
논리와 형식으로 싸우는 SF 외교 스릴러
테익스칼란 제국 시리즈
1. 제국이란 이름의 기억
아케이디 마틴 지음│김지원 옮김│황금가지│580쪽│2만 2000원, 3만 7000원(세트)
2. 평화란 이름의 폐허
아케이디 마틴 지음│김지원 옮김│황금가지│652쪽│2만 4000원, 3만 7000원(세트)
이 SF엔 낯설거나 어색한 발음, 또는 의미의 인명과 단어들이 다채롭게 등장한다. 이번에 한국어판이 나온 미국 SF 작가 아케이디 마틴의 ‘테익스칼란 제국 시리즈’다. 한쪽인 우주 변경의 소국, 르셀 스테이션은 주인공이 마히트 디즈마르이고, 다른 인물들도 이스칸드르 아가븐, 다지 타라츠처럼 비슷한 중동 지역의 느낌이 든다. 영미권에선 이 이름들을 읽는 법이 낯선 독자가 한국보다 많았을 듯하다. 반면 다른 쪽인 테익스칼란 제국의 인명은 예를 들어 세 가닥 해초, 서른 송이 미나리아재비다. 제국의 인명은 대부분 수 단위와 식물을 합한다. 어느 쪽이든 이채롭다.
테익스칼란 제국 시리즈는 1권 ‘제국이란 이름의 기억’, 2권 ‘평화란 이름의 폐허’로 이뤄진다. ‘제국이란 이름의 기억’은 제국 주재 르셀 스테이션 대사인 이스칸드르가 의문의 죽음을 맞자, 르셀의 후임 대사로 마히트가 부임하며 시작한다. 무한한 힘과 부를 과시하며 르셀을 비롯한 우주의 소국들을 압박하는 외양과 달리, 제국의 내정은 음모와 암투의 연속이다. 제국이 노리는 약소국의 대사인 마히트가 강대국의 내부 갈등에 얽히는 정치적 위기, 그 와중에 제국의 정교하고 섬세한 문화에 대한 마히트의 동경이 깊어지는 심리적 위기가 상호작용하며 심화되는 과정을 긴장감 있게 전개한 점이 돋보인다. 기술과 제도가 고도화된 미래상을 논리와 형식이 주 무기인 외교관의 시점에서 흥미롭게 묘사했다.
‘평화란 이름의 폐허’는 1권의 3개월 후를 배경으로, 테익스칼란 제국 국경의 외계 세력과 제국 간 긴장이 고조되는 상황이다. 제국 내에서 무력으로 외계 세력을 제압하려는 쪽과 협상으로 파국을 피하려는 쪽의 갈등을 입체적으로 서술한다. 강대국인 제국의 무력 행사는, 제국에 주재하는 마히트 같은 약소국 대사에게도 최대 현안이다. 제국의 총구가 언제든 자국을 향할 수 있어서다. 결국 테익스칼란 제국 시리즈는 약소국 외교관이 얽힌 강대국의 내정과 외정이란 두 축을 각각 다룬 점에서 SF 외교 스릴러란 정체성이 선명해진다. 저자는 고도화된 기술을 수단으로 인간의 사고, 사회의 방향이 긴장하는 양상을 예리하게 그려간다.
이 시리즈 두 권으로 작가인 아케이디 마틴은 SF 문학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휴고상 최우수 장편상을 각각 받았다. 그는 미국 시카고대에서 종교학을 전공하고 미국과 영국의 유수 대학에서 고전 아르메니아, 중세 비잔틴 제국사 등으로 석사, 박사 학위를 받은 인문학자다. 작품의 인명 등 세부 설정은 물론, 대국을 상대하는 소국 외교관의 내면을 묘파한 필력은 중동에서 강대한 주변 세력에 맞서온 역사와 문화를 전공한 이력이 깊이 반영된 결과로 읽힌다. 앞으로 더욱 의미가 깊어질 SF다.
얽히고 얽혀서 우연이 과학이 되다

‘양자역학’의 역사를 다루는 신간을 볼 때면, 일명 ‘운명’으로 불리는 베토벤 교향곡 5번의 새 음원을 보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처음엔 “또?”란 의문부터 드는데, 막상 들춰보면 경이롭고 신선한 지점들이 여전히, 의외로, 많다. 그래서 당황스러울 때도 있다. 지금까지 나온 양자역학 대중서와 베토벤 연주도 물론 적지 않지만, 이 지식이나 선율은 아직 한계가 없었던 셈이다. 이 우연의 힘을 자주 잊는다.
폴 핼펀 미국 세인트조지프대 물리학 교수의 신간 ‘우연의 의미를 찾아서’는 양자역학에 ‘우연’이란 캐릭터가 잡혀간 과정에 집중한다. 이 책은 양자역학의 이론적, 개념적 지식을 구체적으로 전하는 데 집착하지 않는다. 이 책에 흥미를 느낄 독자라면 양자역학에 대한 기초 지식은 갖췄으리란 전제하에, 양자역학 중에서도 말하려는 핵심으로 곧장 나아가는 서술과 구성의 추진력이 인상적인 책이다.
‘우연의 의미를 찾아서’의 양자역학은 플라톤과 피타고라스부터 알베르트 아인슈타인과 베르너 하이젠베르크까지 무수한 천재들이 시공을 초월한 각본가들처럼 집단 창작한 시나리오에 가깝다. 그런 양자역학의 세계관은 처음엔 정체성이 애매하거나 관계성이 충돌하고, 각본가들이 상대의 복선을 회수하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많은 사건이 얽히더니, 우연과 비약의 개연성을 극단적으로 끌어올린 양자역학의 반전이 일어난다. 따라서 이 책이 가장 빛나는 측면은, 과학과 가장 어긋난다고 여겼던 ‘우연’이란 속성이 하필 현대 과학의 정점 중 하나인 양자역학의 캐릭터로 자리잡은 이야기에 집중한 것이다.
특히 ‘우연의 의미를 찾아서’는 양자역학의 개척자 중 한 사람인 볼프강 파울리와 심리학의 거장 카를 융의 교류에 힘을 싣는다. 특히 인과관계로 설명할 수 없는, 의미 있는 우연의 동시 발생을 뜻하는 공시성(synchronicity)의 개념이 양자역학과 심리학의 두 거장 사이에서 발생해 초창기의 두 분야를 각각 자극한 과정을 생생하게 전한다. 우연까지 과학으로 받아들인 양자역학이야말로 무수한 사람과 생각이 얽힌 우연의 결과라는 사실을 마음껏 즐길 수 있는 책이다.

우리의 미래는 단백질로 이어진다
암, 면역, 대사질환 등에 관여하는 각종 신기능 단백질을 발굴했고 ‘셀’ ‘사이언스’ 등에 270여 편의 논문을 게재한 세계적인 바이오 석학 김성훈 연세대 약대·의대 연구특임교수의 신간이다. 지난 25년간 노벨 화학상 수상의 약 40%가 단백질 관련 연구이며 2024년 노벨 화학상도 ‘단백질 구조 분석 인공지능’ 분야 연구자들이 받았다. 단백질이 세상을 어떻게 바꾸고 있는지, 얼마나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지녔는지 탐구하며 바이오 시대의 현재와 미래까지 짚어볼 수 있는 책이다.
단백질 혁명 김성훈 지음 〡 웅진지식하우스 〡 248쪽 〡 1만 8500원

법과 과학의 경계를 넘나든 마약 전문가의 경고
정희선 전 국립과학수사연구원 원장이 40년의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집필한 국내 최초의 마약 교양서다. 아편, 코카인, 펜타닐, 대마 등 대표적인 마약류의 기원과 부작용 등을 과학적으로 설명하고, 신종 마약의 종류, 마약류 검출 방법, 규제 제도까지 폭넓게 다룬다. 실제 사건과 검출 기술을 아울러서 수사관, 교육자, 학부모 등 누구나 마약의 실체를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구성됐다. 과학수사라는 현실적 관점에서 마약 문제의 실체를 이해할 수 있는 책이다.
위험한 마약 정희선 지음 〡 나녹 〡 280쪽 〡 2만 5000원

환자의 권리를 지켜낸 의사가 남긴 사초
이 책의 저자인 조영걸 울산대 의대 교수는 1990~1993년에 국립보건원 에이즈과에서 공중보건의로 근무한 경험을 토대로, 한국의 B형 혈우병 환자 122명 중 20명이 혈우병 치료제 주사를 맞고 에이즈 바이러스 HIV-1에 집단 감염된 사건을 논문으로 발표했다. 그의 논문이 이 집단 감염 사건을 재조사하는 계기가 됐다. 저자의 한국형 HIV-1 유전자 분석이 거대 제약사의 책임을 묻는 새 판례로 인정받기까지, 20년의 지난한 학문적, 사법적 과정을 사초를 쓰듯 집필했다.
에이즈 바이러스 유전자 분석 새 길을 열다 조영걸 지음 〡 샘 〡 255쪽 〡 2만 원

끊어진 적 없는 거울상, 연금술과 화학
우리 통념과 달리 연금술과 화학은 한 번도 단절된 적이 없다는 통찰에서 시작하는 책이다. 이 책을 쓴 최정모 부산대 화학과 교수는 물질의 본성을 연구함으로써 물질로 이루어진 인간과 세계의 상호작용을 이해한다는 연금술과 화학의 공통점을 토대로, 현대 화학에 여전히 생생한 연금술의 세계관과 개념, 실험 기법의 존재와 의의를 재조명한다. 연금술사는 과거의 화학자이고 화학자는 현대의 연금술사라는 점을 밝혀가는 저자의 치밀한 접근이 인상적이다.
알-케미아 최정모 지음 〡 바다출판사 〡 320쪽 〡 1만 85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