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몸에서 가장 큰 세포, 난자.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달려온 정자 중 하나가, 철옹성처럼 닫혀있던 난자를 뚫기만 하면 생명이 탄생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실상은 다르다. 난자도 수정을 위해 복잡한 관문을 통과해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부터는 정자와 만난 난자가 어떤 고군분투를 이어나가는지 확인해 보자.

난포 | 정자를 유도하는 난자의 프로게스테론
어머나,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 많았지? 끈적한 점액과 질벽을 뚫고 여기까지 온 너희는 정말 특별해. 내가 주변 세포들이 내뿜는 프로게스테론 향기, 잘 따라왔지? 그게 바로 나만의 초대장이거든. 하지만 아직 끝이 아니야! 내 난자 외피층과 투명대를 뚫어야 진짜 만날 수 있어. 드릴처럼 강력하고 정확하게! 누가 제일 먼저 날 만날지 기대되는데?
정자가 열심히 달려온 길을 살펴보자. 질 안에 놓인 약 1억 5000만 마리의 정자들은 끈적한 점액과 산성을 지닌 질벽을 지난다. 그 안에서 길을 잃거나 거친 질벽의 고랑 속에 빠져 더 이상 난자로 향하지 못한다. 그 어려움을 뚫고 자궁 경부로 들어선 정자의 수는 100만 개, 99.8%가 제외된다.
자궁 경부에 도착한 정자는 이제 길을 잃어선 안 된다. 정자의 길이가 50m(마이크로미터1m는 100만 분의 1m), 자궁 경부에서 난자가 있는 나팔관 끝까지의 거리는 18cm. 정자를 키가 170cm인 사람으로 치면 6km를 쉬지 않고 달려야 하는 셈이다. 이때 정자의 방향을 잡아 주는 것이 바로 난자가 내뿜는 호르몬, ‘프로게스테론’이다.
난자는 몸의 주인이 태아이던 시기부터 이미 난소 안에 약 100만 개의 원시난포 형태로 형성돼 있다. 사춘기 이후 월경이 시작되면 달마다 여포자극호르몬(FSH)의 작용으로 난포가 성장하기 시작한다. 난포가 충분히 성숙되면 황체형성호르몬(LH) 증가의 영향을 받아 난포 벽이 터지며 난자가 난소에서 배출돼 나팔관으로 이동한다. 이 과정이 바로 배란이다. 배란은 사람마다 개별 차가 있지만 평균 28일 간격으로 반복된다. 난자가 난소에서 배출될 때 프로게스테론과 함께 배출되는데 이 호르몬은 미약하게나마 자궁에 퍼져 정자를 난자 쪽으로 이끈다. doi: 10.1093/molehr/5.6.507
희미한 프로게스테론을 따라 나팔관에 도착한 정자의 수는 200개 남짓. 지금부터는 더 강한 힘으로 난자를 둘러싼 난자 외피, 그 바깥층인 난모세포층과 투명대를 뚫어 난자 세포막과 만나는 것이 관건이다. 이때 도움을 주는 것도 프로게스테론이다. 난자 외피층이 내뿜은 프로게스테론은 정자 꼬리의 칼슘(Ca2+) 이온 채널 단백질인 ‘캣스퍼(CatSper)’를 활성화한다. doi: 10.1172/JCI173564
프로게스테론과 캣스퍼가 결합하면 정자 꼬리의 이온 채널이 열리면서 칼슘 이온이 정자 세포 안으로 유입된다. 칼슘 이온 농도가 증가한 정자는 꼬리 운동성이 급격히 증가해 난자를 더 효율적으로 파고들 수 있다. 이전 파트에서 설명한 정자의 ‘수정능력 획득’이 일어나는 것이다.
어찌 보면 난자가 정자를 수동적으로 기다리고 있다는 말은 틀린 말이다. 자신을 찾고 따라오도록 정자를 능동적으로 유도했다는 말이 더 맞을 것이다.
정자와 난자가 만나는 과정

나팔관 내부 | 난자와 정자가 결합하는 비밀번호 486!
드디어 여기까지 왔구나! 내 난자 외피층과 투명대를 뚫었다니 정말 대단해. 하지만 아직 마지막 관문이 남았어. 내 자물쇠를 풀 열쇠를 가지고 있니? 열쇠를 맞추는 순간, 난 즉시 수정란이 될 준비를 시작할 거야. 자, 이제 너의 열쇠를 보여줘!
정자가 난자 외피층을 뚫고, 난자의 단단한 보호막인 투명대를 지나왔다면, 일단 1등 정자가 탄생한 셈이다. 하지만 여기서 끝난 게 아니다. “수정 성공!”이라는 외침이 울리려면 마지막 관문을 넘어야 한다. 바로 투명대 안쪽, 난자 막이다.
정자가 난자 막을 돌파하는 건 물리적으로 뚫는 일이 아니다. 그보다는 열쇠로 자물쇠를 여는 화학 반응에 가깝다. 정자와 난자 막에서 서로 짝이 맞는 단백질이 결합하면 난자 막이 열린다. 정자가 가진 어떤 단백질이 그 열쇠일까.
2024년 10월, 오스트리아 과학아카데미 분자생명공학연구소와 빈 바이오센터, 오사카대 미생물 질환 연구소 등으로 꾸려진 국제 공동연구팀이 그 열쇠가 되는 단백질 유전자 세 가지를 밝혀냈다. 열쇠의 이름은 Izumo1, Spaca6, Tmem81이다. doi: 10.1016/j.cell.2024.09.035
연구팀은 알파폴드 멀티머(AlphaFold-Multimer)라는 인공지능(AI) 기반 단백질 구조 예측 도구를 활용해 정자와 난자의 첫 만남이 이뤄지는 과정을 분자적 수준에서 밝혀냈다. 정자는 난자 막의 단백질 JUNO와 결합한다.
JUNO는 난자의 세포막 표면에 발현되는 단백질로, 정자의 단백질과 결합하며 세포막 융합을 이끈다. 세포막 융합이 시작되면 정자의 핵이 난자의 세포질로 들어오며 유전 결합이 시작된다. 사실 정자의 Izumo1은 이미 난자의 JUNO 단백질과 결합한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었다. Spaca6 역시 정자의 성공에 중요한 단백질 유전자일 것이라는 추측은 있었지만, 그 외 메커니즘은 미지수였다.
연구팀은 알파폴드 멀티머로 얻은 단백질 구조 후보들을 기반으로 CRISPR-Cas9 유전자 편집 기술을 사용해 실험을 설계했다. Tmem81과 Spaca6 유전자를 각각 제거한 생쥐와 제브라피쉬를 통해 수정 여부를 확인한 결과, 두 단백질 유전자 중 하나라도 없으면 정자가 난자와 결합하지 못했다. 당연히 수정도 실패했다.
결론은 명확하다. 정자가 난자와 결합해 수정에 성공하려면 정자에 Izumo1, Spaca6, Tmem81이라는 세 가지 열쇠가 모두 준비된 상태여야 한다. 하나라도 부족하다면 난자는 수정되지 못하고, 결국 월경 주기를 따라 몸 밖으로 배출된다.
정자가 난자의 자물쇠를 푸는 것과 동시에, 난자는 수정란이 될 준비를 시작한다. 먼저, 난자는 다른 정자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투명대를 변화시켜 방어막을 형성하고 난자와 정자의 핵은 세포 내부의 운송 네트워크인 미세소관의 안내를 받아 점차 가까워진다.
정자의 핵과 난자의 핵은 사람이 가진 유전물질의 절반 되는 양, 각각 23개의 염색체를 가지고 있다. 마침내 두 핵이 만나 하나로 융합되는 순간, 새로운 생명체의 수정란이 만들어진다. 삶이 시작되는 신호탄이다.
나팔관 입구~자궁 | 낳는 것 보다 키우는 것이 어렵다! 미토콘드리아
앗, 드디어 내 모습이 바뀌었어! 동글동글 예쁜 수정란이 됐지 뭐야. 그런데 수정란으로 살아가는 건 정말 바쁘네. 쉴 틈 없이 세포 분열을 해야 하거든. 배도 고프다! 배가 고프면 일을 못 하잖아. 내 옆에 미토콘드리아 보모에게 에너지를 부탁해야겠어. 열심히 이 과정을 마치고 포근한 자궁 속에 푹 안기고 싶다!
“낳는 것보다 키우는 것이 어렵다.” 흔히 부모의 역할을 이야기할 때 쓰이는 말이지만, 임신 과정에서도 이 법칙은 예외가 아니다. 난자와 정자가 만나 하나의 수정란이 됐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다. 본격적인 과정은 이제 시작이다. 수정란은 배아로 발달하기 위해 세포 분열을 시작하는데, 이 과정에는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에너지는 난자의 미토콘드리아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미토콘드리아는 세포 내 에너지원인 ATP를 생산하는 역할을 한다. 정자의 미토콘드리아는 정자가 난자에 도달하기까지의 움직임을 위한 에너지만 공급할 뿐, 수정 직후 난자 내부에서 제거된다. 따라서 수정란에 존재하는 모든 미토콘드리아는 난자로부터 유래한 것이며, 이는 생명체의 모계 유전 특징을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다.
수정란은 초기 발달 과정에서 이미 난자에 저장된 모성 mRNA(메신저RNA)와 단백질을 사용한다. 모성 mRNA는 배아 발달 초기에 필요한 단백질을 생산하며, 전체 유전자 발현 프로그램을 조율하는 역할을 한다. 동시에 난자의 세포질에 존재하던 미토콘드리아는 세포 내 적절한 위치로 재배치돼 효율적으로 ATP를 공급할 준비를 마친다. ATP는 세포 분열을 위한 엔진과 같다. 세포 주기를 진행하고, 방추사를 형성하며, 염색체를 정확히 분리하기 위해 필요하다.
배아 발생 과정

이 과정이 순조롭게만 흘러가는 것은 아니다. 미토콘드리아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면 배아 발달은 큰 위기를 맞는다. 손상된 미토콘드리아는 활성산소를 과도하게 생성해 세포 내 DNA와 단백질을 손상시킨다. 이로 인해 염색체 비분리 같은 문제가 발생하며, 결과적으로 염색체 이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 또한, ATP 생산이 부족하면 세포 주기가 중단되거나 염색체 복제 과정에서 오류가 발생하기도 한다.
이런 문제는 배아 발달에 치명적이다. 염색체에 이상이 생긴 배아 대부분은 임신 초기인 12주 이내에 자연 유산된다. 성염색체 이상으로 인해 다운증후군이나 에드워드증후군 같은 상태가 발생할 경우에도 정상적으로 착상되고 발달하는 경우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난자와 정자가 만나 수정란이 성숙하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봤다. 이 모든 단계는 말 그대로 기적과도 같은 여정이다. 정자와 난자는 수많은 관문을 통과하며 수정란으로 발전했음에도 착상, 태아 성숙, 그리고 출산이라는 큰 산들이 남아 있다. 이 모든 과정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새로운 생명이 탄생할 확률은 매우 낮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의 존재 자체가 얼마나 놀랍고 경이로운 일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
물론 현대 생물학의 발전은 임신 가능성 자체도 경이로운 수준으로 상승시켰다. 다음 파트에선 난임을 해결하는 과학에 관해 알아본다.


난자가 정자를 수동적으로 기다리고 있다는 말은 틀린 말이다. 자신을 찾도록 정자를 능동적으로 유도했다는 말이 더 맞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