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들어도 이상한 알바 같은데? 나 같으면 안 할 것 같다.”
“집에 붙어 있기 싫어서 그러지.”
유월은 취업 준비 2년 차 백수의 마음을, 에어컨 있고 눈치 보이는 마루인지 혼자 문 닫고 녹아내리는 방인지 매일 택해야 하는 여름의 고통을, 차근차근 설명할까 싶었지만 졸업하자마자 업화건설에 취업한 성주는 모를 것 같았다. 유월은 딱 한 번 인턴으로 취업했었지만 점심 먹고 두 번 토하고, 회식하다 한 번 기절하며 정직원 전환은 물 건너갔다. 정기적으로 가는 병원에서는 선천적으로 위와 신경계가 예민하다며 조심하면서 사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근데 이 동네는 진짜 하나도 안 변했다.” 유월은 멍하니 말했다. 카페 프랜차이즈는 몇 번이나 바뀌었고 그때마다 창문에 그려진 무늬와 창문틀 색은 바뀌었지만 창문 너머 가로수의 모습만큼은 똑같았다. 카페 안에 이상할 정도로 식물이 무성한 것도. 사실동은 옛날부터 나무가 잘 자랐고, 특유의 깊은 색깔이 있었다. 모든 건물이 다시 지어지고 모든 풍경이 바뀌어도 나무만 그대로라면, 언제고 사실동이라고 알아볼 수 있을 듯했다. 몇 번을 다시 태어나도, 이천만 년 지나서 돌아와도.
“많이 변했는데.”
중학교부터 뜬금없이 현실동으로 배정되고, 고등학교 올라가면서는 사실동을 아예 떠나야 했던 유월에게는 특별한 곳이었는데, 평생 사실동 주민으로 산 성주는 별 감흥이 없는 모양이었다. 성주는 유월이 테이블에 올려둔 계약서와 농장생활지침을 멋대로 살펴본다.
“여름 동안 숙식 제공, 한 달 0백. 0백…? 진짜?”
“괜찮지.”
“좀 너무 괜찮은데. 휴대폰 제출? 이건 왜야.”
“문자로 물어봤는데 카메라 빛 때문에 동물들이 스트레스 받는다나. 잘 모르겠어.”
“마약이라도 재배하는 거 아냐?”
약속한 시간이었다. 이들은 짐을 챙겨 길 건너 사실중, 아니 그 부지에 지어진 여름농장으로 향했다. 정문에는 무슨 팰리스 건설 예정이라고 쓴 해진 플래카드가 바람에 흔들렸고, 플래카드 너머 보이는 운동장은 모래를 뚫고 자란 나무들이 하늘로 팔 벌린 숲이었다. 폐교된 지 삼 년인가 사 년밖에 안 됐다고 들었는데 그사이에 나무가 이렇게 자랄 수 있나 싶었다. 엄마 말에 따르면 현실동 미용실과 부동산에서도 은근히 화제인 모양이었다. 업화건설에서 대단지라도 조성하려는 줄 알았는데 그 비싼 땅이 그대로 놀고 있다며. 관리도 안 하는지 풀이 무성하게 자라고, 밤에는 본관에 정체 모를 조명이 환하다는 얘기였다.
경비실 옆 쪽문을 흔들고 두들기고 벨처럼 보이는 것도 눌렀지만 답이 없었다. 문자를 주고받던 번호로 전화를 걸어도 따르르르 신호만 갔다. 뒷문까지 확인해봤지만 앞문보다도 굳은 표정의 낡은 자물쇠로 잠겨 있었다.
슬리퍼 신은 동네 아저씨가 몇 명 지나갔지만 유월과 성주에게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경비실 옆 쪽문이 끼익 한 뼘 정도 자동으로 열린 건, 이들이 문을 흔드는 것도 관두고 돌아갈까 하던 참이었다.
“내일 7시 잊지 말고.”
성주는 아무리 그래도 휴대폰 제출은 좀 걱정된다면서 내일 저녁 뒷문 쪽에서 일단 한 번 접선하자고 했다. 상황도 보고, 퇴근길에 종종 잘 있는지 확인하고 가겠다는 것이었다. 정시 퇴근 가능하냐는 질문에는 어깨만 으쓱하고 말았다. 동네에 온 김에 근 십 년 만에 만난 애매한 사이의 동창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운, 피부로 느껴지는 다정함이었다. 여자 친구 있는 걸 아는데도 자꾸 착각하게 만들었다.
지이잉 소리로 보아 인터폰이나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는 듯 했다. 유월은 지침서의 지시대로 휴대폰을 꺼서 경비실 창턱에 올려두고 학교 안으로 향했다. 길을 잃을 염려는 없었다. 보도블록은 군데군데 꽃처럼 깨져 있었지만, 운동장을 돌아 본관 정문으로 향하는 등굣길은 기억 그대로였다. 학교는 여러 얼굴의 나무로 가득했다. 하늘로 팔을 벌린 운동장 나무, 교실 창문과 바닥으로 기어드는 나무부터 늘어선 화분에 비교적 얌전히 심겨 있는 나무까지.
본관 중앙 현관의 자동문은 고장이 났는지 열린 채로 고정되어 있었고, 건물 안은 온통 넝쿨로 뒤덮여 있었다. 물 냄새를 이길 정도로 짙은 풀 냄새가 났다. 미리 우편으로 전달받은 지도에 따르면 숙소는 1층 왼쪽 복도 맨 끝의 별 표시가 붙은 방이었다. 날이 어두워지니 현관 밖의 나무들이 바로 곁까지 다가와 건물 안을 엿보는 듯했고, 중앙 계단의 창 너머로도 여름풀들이 무서울 정도로 가까웠다. 유월은 약간 빠른 걸음으로 지정된 방으로 향했다.
별 표시 방은 양호실이었다. 가장 안쪽 침대에 짐을 내려놓고 앉으니, 쏴아아아아 나무 소리가 들렸다. 여름이라 싫었고, 여름이라 좋았다. 창문 옆 책상에 간단한 세면도구와 수건 등이 놓여 있었다. 불을 끄고 침대 커튼을 닫으니 세상은 파도 소리 너머로 멀어서, 아주 먼 나라에 온 것 같기도 하고 드디어 안전한 곳에 도착한 것 같기도 했다.
이튿날 아침, 중앙 현관 테이블은 급식대로 변해 있었다. 한쪽에는 익숙한 브랜드의 도시락, 다른 쪽에는 빈 접시가 놓여 있었고, 카드에는 각각 “외부 음식(동물에게 주지 마세요)” “건강 농장 음식(셀프, 적정량: 하루 3-4알)”이라고 쓰여 있었다. 카페에서나 보던 각종 기계가 뒤편에 놓여 있는 걸로 보아 셀프로 주스나 아이스크림, 쉐이크를 만들어 먹을 수 있는 모양이었다. 서너 알이라니 그걸로 식사가 되나 싶었다.
유월은 테이블 발치에 앉아서 도시락을 깨작이며 다시 한번 농장생활지침을 읽었다. 바닥에 앉는 건 어른이 된 이후로 자연스럽게 하지 않은 일이었지만 농장은 이미 반이 풀밭이었다. 풀은 항상 괜찮을 것 같은 느낌을 줬다. 유월이 귀찮은 일 가득인 식물 카페에서 오래 아르바이트한 이유이기도 했다. 손님들은 종종 화분을 넘어뜨리고 잎사귀를 잡아 뜯었지만 식물 카페의 사고는 결코 동물 카페만큼 끔찍하지 않았다. 풀이 라쿤이나 거북이보다 덜 살아 있어서일까.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오히려 더 살아 있기 때문은 아닐까. 진짜로 짓밟아버릴 수 없을 만큼 살아 있기 때문에. 유월은 종종 생각했다.
여름농장의 생활 지침에 따르면 낮에는 별 할 일이 없었다. 교실 문은 전부 열려 있었다. 한 교실에서 유월은 빛바랜 시화를 발견했다.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계절”이라는 구절만 겨우 읽혔다. 교실의 나무 바닥에 빛이 비치고 책상 가득 풀이 자라는 모양새가 너무 자연스러워서, 마치 원래부터 그런 모습이었던 것만 같았다.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은 통행금지 표지판이 가로막았다. 창밖은 온통 초록, 꿈에서 나온 양 흘러 떨어지는 넝쿨들.
유월의 일은 대강당 포도 수확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밤마다 강당 겸 체육관이었던 곳에서 다 익은 포도를 따서 본관 현관에 가져다 두는 일이었다. 강당은 이상한 신전 같았다. 천장까지 뒤덮은 낯선 나무들, 어둡게 밝혀진 조명. 잘 익은 포도는 밤이 되면 은은하게 반짝였다. 포도가 원래 서늘한 어둠 속에서 자라던가 싶었다. 그 반대 아니었던가. 포도는 새벽이 깊을수록 TV에서나 보던 크리스마스 장식이나 고급 호텔 로비의 샹들리에처럼 존재감을 드러냈다. 덜 익은 포도도 반짝이는 다른 포도의 빛을 반사해서 반짝이고 그 빛이 다시 숨겨진 전구들에 반사되었다. 덜 익은 포도를 따지 않으려면 반사된 빛에 속지 않도록 따기 전에 여러 각도로 잘 확인해야만 했다.
몇 번인가 시선이 느껴져서 돌아봤는데, 뜬금없게도 두 번은 까치였고, 한 번은 염소였다. 눈을 의심했지만 진짜 염소였다. 아직 염소 개체를 구별할 정도로 많은 염소를 본 것은 아니었지만, 아침에 마주친 그 염소 같기도 했다. 다리를 편하게 접고 눈을 감고 있다가 귀 한쪽만 반짝 올리길래, 유월은 바구니에서 포도 몇 알을 꺼내 엎드린 염소 앞에 놓았다. 하지만 눈을 가늘게 뜬 염소는 포도를 코로 밀어냈다. 손바닥에 포도를 올려 그야말로 코앞까지 가져다주었지만 염소는 코로 포도알을 유월 쪽으로 조금 더 밀어낼 뿐이었다. 먹을 기분이 아닌가. 나 먹으라는 건가.
쭈그리고 앉은 채 유월은 포도알을 내려다보았다. 반짝반짝해서 그런지 이상하게 맛있어 보였다. 과일 같은 거 원래 좋아하지도 않는데. 과일을 좋아하지 않는 건 탱글탱글한 걸 입에 넣고 베어 무는 순간의 탁 터지는 감각 때문이었다. 어쩐지 조금 나쁜 짓을 하는 기분이었다.
집어 드니 포도알에서 물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오랜만에 오는 비 같은 물 향. 좋은 물 향. 포도알은 탱글탱글하다기보다는 말랑말랑했다. 유월은 여차하면 뱉을 생각으로 아주 조심스럽게 한 알만 집어서 혀에 올렸다. 포도는 생각보다 차가웠다. 물을 통째로 씹는 것 같기도 했고, 의외로 부드러워서 얼음과 아이스크림의 중간 같기도 했다.
그날 밤 유월은 전기가 풀을 키우고 플라스틱이 아주 맑은 물을 받는 세상의 꿈을 꾸고, 중간에 몇 번이나 깼다. 말로 할 수 없는 뭔가를 기다리는, 기대하는 것처럼. 선풍기와 얼음물로 어찌어찌 견딜 수 있는 옛날식 여름이 지나가고 있었다. 이 다음은…
“맛은 괜찮아요?”
바구니를 든 사람이었다. 앞뒤가, 아니 위아래가 맞지 않는 차림이었다. 거의 교복 셔츠처럼 단정한 웃옷에, 무릎까지 바지를 걷어 올리고 고무장화를 신었다. 머리는 자유인처럼 꽁지 끝을 질끈 묶었는데 얼굴은 여름 내내 햇볕 한 번 보지 않은 듯한, 그야말로 도시인 얼굴이었다. 농장에 유월 자신 외에 누군가 관리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여기저기 작고 동글동글한 글씨로 주의 사항이 적혀 있었고, 들어오기 전에도 문자로 대화했으니까. 다만 직접 마주한 것은 처음이었다.
“대체 이 포도는 뭐예요? 개량된 종인가? 밖에서 사려면 뭐라고 검색해야 해요?”
여름마다 먹고 싶었다.
“오, 사장님이 들으면 좋아하시겠다.”
사장님은 어디 있는 누구이며 돈은 제때 들어오나, 여름 지나도 일할 수 있나 같은 질문에 그는 어깨만 으쓱했다.
그는 바구니를 내려놓고 유월 옆에서 놀라울 정도로 비효율적으로 포도를 땄다. 이 정도 반짝이면 따야 돼요, 말아야 돼요 같은 유월의 질문에도 스스로의 판단대로 하라고만 답했다. 자신을 정원이라고 소개한 사람에게, 유월이 그날 밤 배운 거라고는 포도를 아주 천천히, 정말로 천천히 먹어야 한다는 것 정도였다. 이를 쓰지 않고 입안에서 포도를 굴리다 보면 결국 아주 맑은 물맛만 남기고 과일이 사라지는데, 그것이 이 농장의 포도를 제대로 먹는 법이라는 것도. 하지만 “응, 응” 별의미 없는 대답을 메아리 삼아 쓸데없는 소리를 하며 포도를 따는 것은 나쁘지 않았다.
두 시간쯤 지났을까. 유월은 반쯤 찬 바구니를 들고, 정원이 엎드려 있는 긴 의자 발치에 앉았다. 아마 착각이겠지만 이번 여름은 그렇게 덥지 않을 것 같았다. 이처럼 서늘한 여름이 또 올 것만 같았다. 교회나 음악실에 있는 장의자. 낮은 불빛과 지이잉거리는 소리. 선풍기나 형광등이 안정감 있게 진동하며 돌아갔고, 여름밤의 건물이 내는 그 진동이 유월은 싫지 않았다. 그것도 어떤 생명의 소리였으므로. 그녀는 잠깐 하늘을, 천장을 올려다봤다. 워낙 나무로 가득해서 실제보다 높은 느낌에, 왠지 내년을 생각하게 되는 풍경이었다.
“요즘 날씨 이상해서 과일도 잘 안 자란다던데. 여기는 괜찮아요? 포도는 상관없나?”
제대로 된 대답을 기대한 질문은 아니었다. 그래도 대답이 없는 건 이상해서 돌아보니 정원은 무거운 고물폰을 쥔 손을 의자 아래로 늘어뜨리고 뺨을 의자에 내려놓은 채 가만히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고참 알바에게만 허용된다던 2G폰이었다. 유월은 정원이 이전의 염소처럼 금방 시선을 알아채고 눈을 뜰 거라고 생각하지만 한참을 쳐다봐도 정원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손안에서는 낡은 폰이 반짝반짝 소리를 내며 무언가를 알렸고, 잠든 손끝이 파랬다. 반짝이가 묻은 푸른색. 여름농장 포도의 색깔. 얼마나 오래 일했을까.
폰이 금방이라도 손에서 떨어질 것 같았다. 유월은 소리없이 무릎걸음으로 다가갔다. 산업용 선풍기의 바람이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정원의 손끝은 까칠하면서 말랑했다. 직접 잘랐는지 머리카락 끄트머리는 엉망이었고, 셔츠는 여름용이라기엔 너무 두꺼웠으며, 그 탓인지 목덜미에 땀이 송송 맺혀 있었다. 그러니까…. 그는 살아 있었다. 가까이서 보면 모든 게 그랬지만. 모든 게 그랬듯이.
탕비실에서 쉐이크 먹은 컵과 믹서기 등을 설거지하다 보니 저녁이었다. 원래 간식이 당기고 편의점 생각이 날 시간인데도 커피도 다른 음식도 생각나지 않았다. 입가에는 아직 말도 안 될 정도로 거품 맛이–포도 맛이–남아 있었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피곤했다. 온몸에 파도처럼 밀려오는 좋은 피로였다.
유월은 포도 쉐이크도 만들어봤다. 기계 작동법을 알아내는 데 시간이 걸렸지만 보람은 있었다. 다음에는 아이스크림 제작에 도전할 생각이었다. 설거지는 가볍고 쉬웠다. 싱크대에도 손에도 남은 것이 많지 않았다. 유월은 닦아도 닦아도 깨끗해지지 않던, 어느 순간 왜 닦는지조차 알 수 없게 만들던 배달 플라스틱 그릇들을 생각했다.
유월은 자신이 성주와의 약속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벽시계를 보니 이미 9시였다. 아니, 시간이 문제가 아니었다. 농장에서 빈 시간을 보내는 데 익숙해진 대신, 날짜를 세는 것은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다. 급히 뒷문 쪽으로 달려갔지만 푸른 어둠 속 아주 오래된 화분과 삽, 빗자루들이 기다릴 뿐이었다. 괜히 화분 사이를 헤치고 들어가 문을 흔들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다만 창살 사이에서 하얀 것이 툭 떨어졌다. 성주와 같이 갔던 카페의 로고가 그려진 냅킨이었다. “안에서는 아무것도 먹지 말 것. 새벽 두 시”라고만 쓰여 있었다.
두 시만 생각하느라, 포도 따는 데 집중할 수 없었다. 아무것도 먹지 말라는 말은 무슨 뜻인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정원은 보이지 않았다. 반만 찬 포도 바구니를 현관에 두고 건물 뒤로 돌아가니 검은 모자를 쓴 성주가 보였다.
“그 안에서 재배하는 거, 먹은 건 아니지? 이상한 거 재배하지 않아? 한 번도 못 본 과일.” 성주는 말했다. “경찰이 수사하고 있어. 상황이 안 좋아. 잘못하면 공범으로 잡혀들어갈 수도 있고.”
증거가 될만한 건 뭐든 챙겨나오라는 말이었다. 유월이 말했다. “증거? 무슨 소리야. 무슨 증거…”
“정신 차려. 이건 현실이야.” 성주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로 창살 너머로 유월의 팔을 잡고 흔들었다. “뭐든 상관없어. 장난이 아니라, 경찰이 주시하고 있다고. 네가 알고 한 게 아니라고 입증할 증거가 있어야 돼. 어떻게 될지 몰라. 얼른. 이거 먹고, 정신 차리고 필요한 것 챙겨서 나와. 여기서 기다릴 테니까.”
성주가 건네준 삼각김밥은 여름의 온도 때문인지, 금방 데워 온 덕분인지 온기가 느껴졌다. 유월은 어두운 복도에서 삼각김밥을 뜯고 한참을 쳐다봤다. 그때까지만 해도 먹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음식의 냄새를 맡자 손이 습관으로 움직였다. 첫입은 한동안 쓰지 않은 근육을 쓰는 것처럼 뻑뻑했다. 김밥에 들어 있는 모든 재료의 맛이 한 번에 느껴졌다. 더운 고기와 말린 우엉과 비닐에 낀 쌀.
토할 것 같았다. 농장의 풀꽃 가득한 바닥에 전부 토해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어쨌든 입에 물고 있다 보니 음식물이 입안에 섞여 들었다. 아삭아삭 낯선 소리가 났다. 다른 모든 걸 잊을 정도로, 아플 정도로 맛있었다. 입안 구석구석까지 기름이 가득했고, 손에 소스와 익숙한 짠맛이 묻었고. 유월은 결국 2분도 안 돼 비닐까지 핥아먹었다.
2층에는 성주가 말한 증거가 있을지도 몰랐지만 올라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증거. 증거. 증거 될 만한 게 뭐가 있지. 어제 정원의 손에 있던 폰도 생각이 났지만 가져오려다 깨우기라도 하면 뭐라고 할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유월은 가방에 계약서와 농장생활지침을 구겨 넣었다. 짐을 챙겨 들고 여름농장을 나오는 과정은 무서울 정도로 쉬웠다. 성주는 유월이 화분을 딛고 담을 넘게 도와주었다. 손이 떨려서 생각보다 시간이 걸렸다. 이제 집에 가고 싶다, 혼자 갈 수 있다고 했지만 성주는 완강했다. 이대로 혼자 보낼 수는 없으며 뭐라도 먹고, 눈이라도 잠깐 붙이고 가야 한다고 했다. 비밀번호로만 열리는 문을 둘이나 지나고 금속으로 된 가짜 나무 조각이 가득한 정원을 돌아, 이들은 마침내 성주의 아파트로 향하는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업화건설에 취업하고 독립해서 산다고만 알았는데 성주네 아파트 거실 뷰는 굉장했다. 서울을 거꾸로 들고 내려다보는 것 같았다. 올려다보기만 했던 건물들이 납작하게 보였고, 특히 여름농장이 놀라울 정도로 잘 보였다. 성주는 제대로 설명 못하고 놀라게 해서 미안했다며, 새것 같은 하얀 정수기에서 찬물을 따라주었다. 유월이 약속 시간에 나오지 않아서 회사 동료를 통해 알아봤다는 것이었다. 여름농장은 아니나 다를까 신종 마약 재배로 의심받고 있었다. 알 사람은 다 아는 얘기라고 했다.
“오늘 두 시에도 안 나오면 진짜 쳐들어가야 하나 했다.”
“포도… 먹긴 했어. 많이 먹은 건 아닌데.” 말하면서 비로소 기억해 내는 느낌이었다. 거의 일주일 내 포도만 먹었다는 사실. 하루 한 알이나 두 알만 먹고도 다른 음식에 대한 갈망을 아예 잊고 있었다는 사실. 잠을 엄청 많이 잤고 피로가 풀렸다는 사실을 말했다. 하지만 말할수록 어쩐지 기분이 이상했다. 너무 매끈하고 아무도 안 사는 듯한 그 집의 인테리어도, 성주의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반짝이는 눈빛과 테이블 위에 반짝이는 휴대폰도.
“너 녹음해?”
어떤 직감에 유월은 물었다.
“무슨 녹음이야.”
성주는 풋 웃으며 휴대폰을 치웠다. 그러더니 다른 얘기를 시작했다. “내일도 있다가도 돼”라던가 “뭐 좀 먹을래? 쉴래?” 같은. “근데 이러고 있으니까 중학교 때 같다. 너 걸핏하면 우리 집 와서 자고 가고 그랬잖아”라고도 했다. 성주는 항상 의외의 디테일을 기억했다. 아, 얘 아주 어른이 됐나 하는 순간에 어떤 중요한 것을 추억했고, 사람은 변하는구나 싶은 순간에 아주 오래된 말을 했다.
유월은 안방을 내주겠다는 성주의 제안을 극구 사양하고, 이불 하나만 받아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베란다에는 망원경 같은 것이 설치되어 있었다. 유월의 시선을 눈치 챈 성주는 취직하고 별 보는 취미가 생겼다면서 천체 망원경이라고 설명했다. 거기까지가 아는 세계의 기억, 아니 안다고 생각했던 세계의 기억이었다.
유월은 가슴을 스치는 이상한 예감에 눈을 떴다. 냉방이 낮게 돌아갔다. 애초에 창문 열고 선풍기로 몸을 식히는 것이 아니라 에어컨 냉방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열 수 있는 창 자체가 별로 없는 구조였다. 몸을 일으키자 맨발에 매끄러운 마룻바닥이 닿았다. 이상하게 가슴 속까지 차가웠다.
분명 커튼을 열어두었던 것 같은데 암막 커튼이 베란다와 마루 사이를 가리고 있었다. 충동적으로 이불을 치우고 일어나 커튼을 열자 예상 못한 광경이 펼쳐졌다. 유월은 2초 정도 지나서야 뭐가 문제인지 깨닫는다. 여름농장이 지나치게 밝았다. 이 거리에서도 보일 정도로. 그리고 망원경은 하늘이 아니라 여름농장 본관에 조준되어 있었다. 파인더에 눈을 대고 보자 확실했다. 빛이 아니라 불. 농장은 불타고 있었다.
성주는 욕실에도, 안방에도 없다. 유월은 어두운 서재로 급히 가려다 책상 모서리에 발을 찧었다. 유월의 계약서와 농장생활지침이 팔랑팔랑 떨어졌다. 서류를 닥치는 대로 집어 든 유월은 아무 옷이나 걸치고 뛰쳐나갔다.
농장의 뒷문은 열렸다기보다 부서져 있었다. 진짜 불이 났는지 농장은 이상한 냄새로 뒤덮였다. 타닥타닥 풀이 타는 소리. 풀도 살처럼 탔다. 평소와 다르게 밝았다. 낮은 짐승 울음소리 같은 것이 들렸다. 크지 않지만 귀를 뗄 수 없는 소리였다. 유월은 새삼 원래의 여름농장이 얼마나 조용하고 잠으로 가득 찬 곳이었는지 깨달았다.
2층으로 올라가야 하나, 아니면 이 시간엔 대강당에 있으려나 오만 생각이 머리를 스쳤지만 오래 찾을 필요는 없었다. 정원은 벽시계 밑에 서서 벽장 안의 트로피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전국포도협회, 환경을 생각하는 농부 협회, 쓰레기 없는 식품 유통을 위한 폭력 없는 혁명위원회, 언더그라운드 포도밭 네트워크… 정원은 평온했다.
“불이 생각보다 빨리 번지네.”
“누가 감시… 하고 있었어요. 뭘 알아내려 한 건지 모르겠어요. 제 가방을 다 뒤졌는데. 그러면… 일단 나가야…”
당장 그의 소매를 잡고 끌어당겨서라도 나가고 싶었지만, 어쩐지 선뜻 가까이 갈 수 없었다. 정원을 둘러싼 보이지 않는 공간의 원이라도 있는 것처럼. 가까이 있는데도 그들은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았다.
“대충 어떻게 된 건지 알겠다. 나 혼자인지 포도밭 네트워크가 낀 일인지 확인하려고 한 것 같은데, 괜찮아요. 어차피 언젠가 일어났을 일이니까.” 포기한 사람의 친절함 같기도 하고 어딘지 어린애 달래는 말투도 섞여 있었다. “진작 옮겼어야 했는데.” 정원은 말했다. 완전식품의 유통은 식품 생산, 유통, 쓰레기 처리 등 너무 많은 업체의 이윤과 정면 배치되기 때문에, 264포도는 개발 초기부터 각종 테러 위협에 시달렸다는 것이다. 원래 농장을 옮기던지 규모를 줄였어야 할 타이밍인데 알면서도 동물들 때문에 계속 미루고 있었다고 했다.
어느새 복도에 염소 몇 마리가 천천히 나타나서 이쪽을 쳐다봤다. 친구를 지키려는 것 같기도 했고, 집을 떠나지 않으려는 것 같기도, 유월에게 책임을 묻는 것 같기도 했다. 처음 농장에 들어올 때만 해도 그들의 등이나 다리나 목덜미가 가까이 오는 게 낯설었는데 지금은 그들이 없는 세상이 빈 곳일 것만 같았다. 2층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발굽 소리 대신 신발 소리. 인간의 구두 소리.
유월의 어깨를 감싸안고 현관문까지 데려다주며 정원은 말했다. 너무 모든 게 끝났다고는 생각하지 말라고. 식물의 장점은 죽었다가도 끝없이 다시 돌아오는 것이므로, 그 힘을 믿어야만 한다며. 그는 작은 화분 하나를 유월의 팔에 안겼다. 유월의 마음은 말이 되어 나오지 않는 의문으로 가득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어떻게 다시 돌아오는데요. 모든 게 어떻게 끝나지 않는 건데. 하지만 정원은 더 이상 답해 주지 않고 할 일이 있다며 건물로 들어갔다.
교정을 나와서는 119에 계속 전화했지만 연결이 되지 않았다. 아주 잠깐, 여름이 가장 차가워지는 시간이었다. 파란색에 가까워지고, 그리고 어쩌면 본질에 가까워지는. 해가 뜨기 전 푸른 거리에는 아무도 없었고, 농장에서는 불이 커다란 연기로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풀은 왜 불에 타는 걸까. 풀은 왜 그리고 왜 우리는–유월은– 깨닫는다. 여름이 올 때마다 뭔가 끝나가는 듯 가슴이 내려앉았던 건 그녀가 여름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더위는 물론 두려웠다. 하지만 어떤 형태로든 견디면 되는 일이었다. 반대로 만약 기억 속 서늘한 여름이, 여름의 본질이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건 견딜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한없이 그리워할 것이었다. 계속 계속 계속.
------------------
성주는 연락이 되지 않았다. 서울 한복판의 마약 농장이 적발됐다면 뉴스에 나올 법도 했는데 화재에 대해서도 작은 기사 하나 없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긴장하고 기다렸지만 경찰에서도 어떤 연락도 오지 않았다. 어디부터 어디까지 거짓말이었을까. 전부 다였던 것 같기도 했다.
유월은 혹시나 해서 다니던 병원에서 검진도 받았지만 몸은 어떤 이상도 없고 이상한 성분도 검출되지 않고, 모든 영양소가 놀라울 정도로 균형 잡힌, 건강한 상태라고 했다. 여름에 식이요법을 잘한 모양이라고 칭찬도 받았다.
“저 진짜 포도만 먹었는데요…”
“이번 여름처럼만 먹어요. 앞으로도. 하나의 식품으로 살아있는 데 필요한 모든 영양소가 충족 가능했다면 참 좋았겠지만, 그런 건 없죠.”
유월은 물었다. “있다면요?”
“완전한 식품이 존재한다면? 제대로 보급되면 인류의 많은 문제가 해결되겠죠. 기근이나 사회 불평등부터…”
“세상이 아주 깨끗해질 수도 있을까요.” 유월은 물었다. “완전한 과일 같은 게 있어서 다들 뒷마당에서 그것만 키워도 먹고 살 수 있다면…”
“그렇네요. 환경 쪽도 생각할 수 있겠네. 하지만 사람들이 맛있고 자극적인 음식을 포기할 것 같진 않아요. 영양소를 충족하는 걸로 만족했다면 우리가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을 테니까. 좋은 의미로도, 나쁜 의미로도 말이에요.”
분갈이도 몇 번 해 주었지만 화분에서는 아무것도 자라지 않았다. 엄마가 돌보는 베란다의 식물들 틈에서 반짝이는 열매를 맺지도 않고 그렇다고 죽지도 않고, 있으나마나한 존재감으로 가만히 숨 쉴 뿐이었다. 여름 내내 쭈그리고 앉아 화분을 관찰하며 추가로 안 사실은 하나뿐이었다. 밑동에 얕은 음각으로 새겨진 264포도라는 이름. 센스 없는 이름, 유월은 생각했다. 농장생활지침 마지막 장에도 작게 인쇄되어 있었다. “내가 바라던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 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여름도 끝나가고 겨우 다시 걸을 만한 날씨가 되어 유월이 다시 사실동에 들렀을 때는, 여름농장은 업화건설의 현수막으로 포장되다시피 한 상태였다. 성주의 업화건설. 마침내 땅 소유권 문제가 정리되어 대단지 공사에 들어간다는 것 같았다. 일대에 부동산을 산 사람들도 아주 기뻐한다고 들었다.
하지만 현수막 밑으로 아직 맨흙이 드러난 곳들이 있었다. 유월은 사람이 지나가지 않는 뒷문 쪽에 쭈그리고 앉아 흙을 만졌다. 차갑고 까끌까끌했다. 유월은 준비해 온 삽으로 흙을 긁어모아 빈 페트병에 넣었다. 당장은 그것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저자 소개
‘올림픽공원 산책지침’으로 2023년 제3회 문윤성 SF 문학상 중단편 부문 우수상을 수상했고, 과학동아 2024년 8월호에 ‘기억과 사회’를 기고했다. 기후 변화와 환경 오염, 서울에 대해 계속 쓰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