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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요기사][유사과학 테이스팅 노트] 과학자들조차 창조과학을 믿는 이유

    고위공직 후보자가 창조과학을 믿는다고 청문회에서 질타받는 장면은 잊을 만하면 등장한다. 후보자는 보통 “대안적 이론도 같이 가르쳐야 한다” 같은 말로 상황을 모면하려 한다. 이런 사례들은 창조과학을 공개적으로 믿는 데 큰 허들이 있음을 보여주지만, 그와 동시에 믿음이 꽤나 견고하다는 것도 보여준다. 창조과학은 어떤 사람들이 믿는 것일까?

     

    편집자 주
    겉보기엔 과학처럼 보이지만, 과학이 아닌 것. 유사과학은 알게 모르게 우리 삶 깊숙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왜 사람들은 유사과학에 끌릴까요? 유사과학을 연구해 온 필자가 유사과학의 각기 다른 맛을 분석하며 그 속의 본질을 짚어봅니다.

     

     

     

    2012년, 국제 학술지 네이처에 ‘한국, 창조론자의 요구에 항복하다’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과학 교과서 출판사들이 ‘교과서진화론개정추진위원회(교진추)’라는 창조과학 단체의 요구를 수용해 교과서에서 진화론 서술을 삭제했다는 내용이었다.


    진화론 삭제 청원은 생물학계를 비롯한 과학계의 반발로 무산됐지만, 이 사건은 유사과학을 대학원 연구 주제로 잡고 구체적인 사례를 탐색하던 필자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창조과학이 다른 유사과학과 다른 점은 그 체계성과 영향력에 있다. 진화론 삭제 청원을 넣은 교진추, 그리고 그 배후에 있는 ‘한국창조과학회’는 창조과학을 지지하는 이공계 학자들이 모인 단체들이다. 이들 중 상당수는 이공계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대학이나 연구소 등에서 연구 활동을 하고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창조과학자들은 과학과 믿음 사이에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어떻게 정당화하고 있을까? 일단 창조과학이 어떤 주장을 하는지부터 알아보자.

     

    창조론은 오래됐지만 창조과학은 젊다


    창조과학은 우주와 생명이 신에 의해 창조됐다고 주장하는 유사과학이다. 창조과학의 중심에는 기독교 성경에 대한 문자주의적인 해석을 바탕으로 하는 두 가지 주장이 있다. 첫 번째는 ‘젊은 지구 창조설’로, 우주가 성경의 창세기에 기록된 순서 그대로 7일 만에 창조됐으며, 이 창조가 수천 년에서 수만 년 전의 가까운 과거에 일어났다는 주장이다. 두 번째는 ‘홍수지질학’으로, 성경에 기록된 ‘노아의 홍수’가 실재했던 사건이며, 현재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모든 지층, 지형, 화석이 과거에 있었던 단 한 번의 격변으로 인해 생겨났다는 주장이다.


    성경을 ‘문자주의적’으로 해석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근본주의’에 대해서 잠깐 알아봐야 한다. 근본주의(Fundamentalism)는 19세기 후반 미국에서 발생한 보수 기독교 운동으로, 성경의 내용이 일점일획까지 모두 신의 영감을 받아쓴 것이기에 성경에 오류란 없다고 주장한다(이를 조금 어려운 용어로 ‘축자영감설’과 ‘성경무오설’이라고 한다). 근본주의의 영향을 받은 창조과학 진영은 성경에 오류가 없다는 이 주장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그들은 성경, 특히 창세기가 실제로 일어난 역사적·과학적 사실을 담고 있으며, 성경을 주관에 따라 ‘해석’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생긴다. 종교적 믿음의 영향력이 더욱 강했던 중세 시기에도 성경을 문자주의적으로 해석했을까? 중세인들도 현대의 창조과학 지지자들과 비슷한 주장을 믿었을까? 지구평면설을 다룬 지난 연재에서, 우리는 중세인들이 지구평면설을 믿었을 것이라는 역사적 오해를 ‘플랫 에러’라 부른다고 얘기했다. 중세인들이 젊은 지구 창조설과 홍수지질학을 믿었을 것이라는 짐작 역시 플랫 에러와 비슷한 역사적 오해라고 볼 수 있다. 창조과학은 20세기 미국에서 발명된 것이기 때문이다.


    창조과학은 미국의 기독교 근본주의 종파인 안식교의 창시자이자 예언자인 엘렌 화이트의 주장에서 시작됐다. 화이트는 계시와 환상을 통해 신의 말씀을 직접 들었다고 주장했는데, 그중에 현대 창조과학의 뿌리가 되는 주장들이 있었다. 이후 안식교인이자 아마추어 지질학자였던 조지 맥크리디 프라이스가 1923년에 ‘새 지질학(The New Geology)’을 출간했고, 이 책의 영향을 받아 존 휘트컴과 헨리 모리스가 1961년에 ‘창세의 홍수(The Genesis Flood)’를 출간했다. 창조과학의 중심축이 되는 두 주장인 젊은 지구 창조설과 홍수지질학의 큰 줄기는 이 책에서 확립됐다. 즉, 창조과학 운동이 본격화한 지는 채 100년이 되지 않은 것이다.

     

    ▲Roger Bolsius(W)

     

    ▲Agsftw(W)
    미국 애리조나주에 있는 거대한 협곡인 그랜드 캐니언(왼쪽)과 미국 휴스턴 자연사박물관에 전시된 공룡 트리케라톱스의 화석(위). 대개 지질학, 진화론과 연관되는 둘을 창조과학에서는 대홍수의 증거로 해석한다.

     

    창조과학은 교인을 위한 체계

     

    ▲Answers
    창조과학의 증거가 정당하다고 주장하는 잡지의 표지.


    창조과학이 등장하기 전 세상에는 창조론(creationism)이 있었다. 생명체가 시간에 따라 변이한다는 진화론의 대두, 그리고 우주와 지구의 나이가 수십억 년에 이른다는 과학적 발견이 있기 전에 세상의 시작을 설명하는 가장 그럴듯한 이론은 초자연적인 존재에 의해 우주가 창조됐다는 주장이었다. 기독교, 힌두교, 이슬람교를 비롯한 여러 종교 체계와 세계 각지의 민족들이 나름의 창조론, 또는 창조 신화를 통해 우주의 창조를 설명한다.


    창조론은 세계관을 설명하는 틀이자 사회적 질서를 정당화하는 서사이다. 우주의 기원, 계절 변화, 인간과 신의 관계, 성에 따른 역할 분배 같은 것들이 창조론의 서사를 통해 설명되고 정당화됐다. ‘과학’이라는 지식 체계가 없었던 당시에는 창조론을 과학적으로 검증한다는 개념도 당연히 없었다. 이는 현재의 기독교 창조론에도 유효하다. 창조론을 연구하는 신학자들의 주된 질문은 ‘신에 의한 창조가 실제로 일어났는가?’가 아니라, ‘신은 왜 세상을 창조했는가?’, ‘신은 악도 창조했는가?’와 같은 보다 철학적이고 추상적인 질문이다.


    많은 신학자가 창조과학을 비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신학적으로 보았을 때 과학으로 성경을 증명하려는 창조과학의 시도는 과학에 대한 맹신으로 비친다. 성경은 그 자체로 진리이며 증명할 필요가 없는데, 굳이 과학적 방법론에 기댄다는 것은 과학적 지식을 성경의 진리보다 더 신뢰하기 때문이 아니냐는 것이다.


    창조과학 지지자들은 이에 대해 자신들은 성경을 과학으로 증명하려 한 적이 없다면서 펄쩍 뛴다. 창조과학은 성경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변증’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말이다. 변증(apology)이란 신학 용어로, 간단히 말하자면 기독교 신앙에 대한 외부의 공격과 내부의 의심을 방어하는 작업을 의미한다. 즉, 창조과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창조과학은 성경의 역사성·사실성에 대한 기독교 내외부의 공격을 방어하는 지식 체계이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창조과학이란 오로지 성경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 교회 내부인들만 사용하는 주장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Michelangelo(W)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 미켈란젤로가 그린 ‘아담의 창조’. 창조과학은 창조론을 과학의 관점에서 해석한다는 이유로 신학계에서 비판적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관찰과학과 역사과학, 창조과학자들의 전략


    창조과학의 흥미로운 점은 실제로 많은 과학자가 창조과학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말하는 ‘과학자’란 이공계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대학이나 연구소 등에서 연구 활동을 하는 이들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필자가 창조과학 사례로 분석했던 고려대 의과대학의 한 교수는 한국창조과학회 회장을 역임한 창조과학자이자 실험실에서 예방의학을 연구하는 과학자였다. 심지어 이 교수는 창조과학에서 모티브를 딴 주제를 토대로 연구 계획을 수립해 정부의 지원을 받기도 했다.


    이처럼 창조과학자들은 ‘창조과학자’라는 정체성과 ‘과학자’라는 정체성을 동시에 가지는 것처럼 보인다. 어떻게 과학자라는 사람들이 생물학의 가장 기초가 되는 이론을 부정할 수 있으며, 지구의 나이가 6000년에 불과하다고 믿을 수 있을까? 이들은 가짜 과학자일까?
    과학자의 정체성 문제를 다룬 여러 과학기술학 연구는 모순을 겪어야 마땅할 것 같은 상황에 있는 과학자들이 어떻게 스스로의 정체성을 합리화하는지 보여준다. 예를 들어 핵무기를 개발하는 과학자들은 호전적인 전쟁광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들을 직접 인터뷰하고 관찰한 연구에 따르면 그렇지 않다. 핵무기를 개발하는 과학자들은 다양한 정치적·종교적 성향을 보이고 있었으며, 자신들이 개발하는 무기가 핵 억지력을 발생시켜서 결과적으로는 핵무기가 절대로 사용되지 않게 되는데 이바지하고 있다는 논리를 공유하고 있었다. 창조과학자들 역시 바깥에서 볼 때는 이해할 수 없는, 그들 자신의 정체성을 합리화하는 내부 논리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관찰과학’과 ‘역사과학’이라는 구분이다.


    관찰과학과 역사과학은 창조과학자들의 과학관을 이루는 두 축이다. 관찰과학은 현상에 대한 직접적인 관찰과 실험을 통해 얻는 지식을 의미한다. 세포생물학, 분자생물학, 화학, 역학, 기계공학, 전자공학 등이 여기에 속한다. 반면에 역사과학은 과거에 일어났던 현상에 대한 추측과 가설을 의미한다. 창조론, 진화론, 빅뱅우주론 등 생물이나 우주의 기원에 관한 주장이 여기에 속한다. 이러한 구분은 창조과학 진영에서 만들어낸 것이며, 주류 과학계나 과학철학계에서는 이러한 구분을 전혀 인정하지 않고 있다.


    왜 이런 분류가 필요할까? 현대 과학의 성과를 부정하지 않으면서 논쟁이 되는 주제(진화론 vs. 창조론)를 그로부터 분리하기 위해서이다. 창조과학자들은 진화론을 제외한 현대 생물학이 우리가 직접 ‘관찰’할 수 있는 생명 현상을 연구하기 때문에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말한다. 그러니 ‘현대 생물학의 근본인 진화론을 부정하는 사람들을 진짜 과학자라고 할 수 있을까’라고 창조과학 지지자들을 공격해도 아무런 타격이 없는 것이다. 또한 창조과학자들의 과학관에서 역사과학은 애초에 증명이 불가능한 영역에 속한다. 과거에 일어난 사건은 누구도 목격한 적이 없고, 실험적 재현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여기서 더 나아가 역사과학이 자연과학의 대상이 될 수 없는 분야라고까지 말한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점은 대부분의 창조과학자가 관찰과학을 전공 분야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실험실에서는 연구를 수행하면서도 실험실 바깥에서는 저술이나 강연을 통해 자신의 전공 분야와 동떨어진 분야인 우주나 생명의 기원을 다룬다. 이런 그들에게 관찰과학과 역사과학이라는 분류는 자신의 정체성을 합리화하는 도구로 사용되며, 비전공자로서 기원 문제에 대해 발언할 수 있는 명분이 된다.


    ‘과거에 일어난 사건을 증명할 수 없다’라는 입장은 증거를 통한 논리적 설득과 합의로 이뤄지는 과학의 일반적인 발전 방식을 전면으로 부정하며, 성경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라는 렌즈를 통한 본인의 주관적인 경험만을 중요하게 여긴다. 이는 본 연재 3화에서 살펴봤던 지구평면설 지지자들의 입장과도 유사한 측면이 있다. 마치 지구평면설 지지자들이 우주에서 찍은 지구 사진에서 조작과 은폐의 흔적을 ‘알아보는’ 것처럼, 창조과학 지지자들은 지층과 화석에서 창조와 홍수의 흔적을 ‘알아본다.’ 창조과학 지지자들에게 진화의 증거를 아무리 들이밀어도 소용없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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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년 10월 과학동아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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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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