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담이 20년 만에 한국에서 열린다.
오는 10월 31일부터 11월 1일까지 열리는 정상회담에 앞서 8월 13일 인천 송도에서는 APEC 회원국의 여성 과학기술인들이 모여 미래를 위한 고민을 나누고 지속가능한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자리가 마련됐다.
2025년 한국에서 처음 개최된 ‘APEC 2025 Women in STEM 심포지엄’ 현장의 뜨거운 분위기를 전한다.

세계 여성과학인의 날 제정을 이끈 과학자 겸 이라크 공주, 한국 대표 여성과학기술인 단체 ‘대한여성과학기술인회(KWSE)’를 이끄는 회장, 윤리적 인공지능(AI) 개발을 실천하는 영국의 청년 기업가, 그리고 자신만의 길을 찾아 나선 한국과학영재학교 학생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대활약 중인 여성 과학기술인들이 8월 13일 인천 송도컨벤시아에 모여 서로의 경험을 나누는 행사가 열렸다.
이 행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담을 앞두고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한국여성과학기술인육성재단(WISET)이 주관한 ‘APEC 2025 Women in STEM 심포지엄’으로, 2025년 APEC 의장국인 한국에서 개최됐다.
특히나 네 명의 여성 과학기술인이 롤 모델로서 미래 세대에게 자신의 경험을 나누는 ‘Girls in STEM 워크숍’이 열려 관심을 끌었다. 롤 모델 강연의 연사로 선 네 명의 여성 과학기술인은 니스린 엘 하셰미티 국제왕립과학재단(RASIT) 회장, 임혜원 대한여성과학기술인회 회장, 조앤 보이스 인클루드 AI(InClued AI) 설립자 겸 대표, 김경언 한국과학영재학교 3학년 학생이었다.
먼저 유리천장 깨트린 선배 과학자들의 조언
권오남 한국여성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회장이 사회를 맡은 가운데, 하셰미티 회장이 강연의 포문을 열었다. 그는 별명인 ‘과학 공주(the science princess)’로 잘 알려져 있다.
“저는 과학 관련 학위를 네 개나 받았습니다. 그리고 최초의 왕족 출신 의사이자 과학자가 되면서 고정관념을 허물었습니다. 저도 다른 사람처럼 일하고, 월급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제 연구 분야는 암 유전학 중에서도 여성에게만 발생하는 폐질환인 림프관평활근종증이었습니다. 제가 개발한 치료법은 이후 제가 암 치료를 받을 일이 생겼을 때, 제 병을 치료하는 데 사용되기도 했죠.”
왕족으로서, 그리고 의과학자로서 눈부신 경력을 쌓은 그였지만 과학기술계가 여성 앞에 쌓은 벽은 높았다. 그는 “내 급여가 남성 동료보다 적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면서 “이 일을 계기로 사회적 정의를 위해 힘쓰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국제왕립과학재단의 회장으로서 세계 각국에 있는 여성 과학기술인들의 연맹을 만들고, 세계 여성 과학인의 날(매년 2월 11일)을 제정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등 미래 세대의 여성 과학기술인들이 꿈을 펼칠 수 있도록 초석을 닦았다.
한편, 임 회장은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미래융합전략센터의 첫 여성 소장을 역임한 국내 뇌과학 연구의 권위자다. SCI급 논문을 200개 이상 발표하고, 95개의 특허를 취득한 그는 자신의 성공 비결을 “선택, 적응, 비전”으로 꼽았다.
“제가 도전을 극복해 온 방법 세 가지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첫째는 선택입니다. 아직 가슴을 뛰게 하는 것이 없다면, 지금의 선택을 믿는 것도 방법입니다. 둘째는 적응입니다. 진로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마음을 은근히 끌어당기는 것을 따라가 보세요. 삶은 때로 예상치 못한 전환점에 도달합니다. 제겐 그게 신경과학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비전을 가지세요. 비전은 바른길로 안내하고, 마음이 흔들리지 않게 합니다. 저는 늘 우리 경제와 미래 세대에 기여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같은 행사에서 멘토링을 하는 게 제 핵심 가치이자 비전이에요.”

소수이기에 더 잘 알아볼 수 있는 숨겨진 가치
선배 여성 과학기술인의 조언에 이어, 현재 과학기술계에서 고군분투하는 차세대 여성 과학기술인들의 이야기도 공유됐다. 보이스 인클루드 AI 대표는 “여성이라서 더 잘 포착할 수 있는 연구과제들이 많다”고 설명했다. 그가 창립한 인클루드 AI는 포용적인 AI 도구를 개발하고 서비스한다. AI는 인간이 생성한 데이터를 학습한다. 그렇기에 인간의 편견 또한 AI에 고스란히 남는다.
“AI에게 다양한 인종과 성별의 얼굴 데이터를 주고, 고임금 직업을 가진 사람을 구별해내라고 하면, 밝은 피부의 사람을 고릅니다. 집을 청소하는 사람 이미지를 생성하라고 하면 여성을 그려내죠. AI는 여성을 엔지니어로 인식하지 않습니다.”
보이스 대표에게 이런 AI의 편향은 오히려 여성이 활약할 새로운 무대로 보였다. 포용성을 가진 AI를 만들기 위해서는 더 다양한 사람이 연구 현장에 뛰어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AI를 학습시킬 데이터를 수집하는 단계에서부터 더 다양한 계층의 개발자를 참여시키는 게 중요하다”면서 “나의 경우 이런 AI의 편향성을 보며 느낀 위화감을 토대로 기업을 창립하게 됐다”고 말했다.
“여성들이 일상생활을 하면서 느끼는 다양한 부침이 있을 거예요. 네 아이를 키우는 어머니의 경우엔 아이들의 일정을 관리하는 게 어렵겠죠. 그렇다면 그걸 해결하는 AI를 개발할 수 있어요. 여성의 일상생활에 AI를 결합하는 일은 늘 무시돼 왔죠. 주류가 아니라서요. 그렇기에 더 여성에게 열린 가능성이 커요.”
김경언 양의 조언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는 한국과학영재학교에서 우수한 또래 학생과 경쟁하며 얻은 스트레스로 탈모가 찾아온 자신의 이야기를 공유하며 청중의 공감을 얻었다. 김 양은 “우수한 학생들이 많이 있는 환경에서, 여성, 아이들, 취약계층이 침묵을 강요당하는 일이 많다”면서 “나는 소수자가 되는 것이 어렵다는 걸 알고 한국과학영재학교 내에 국제학생 카운슬링 프로그램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이어서 진행된 질의응답 시간엔 과학기술계 여성들의 피부에 와 닿는 현실적인 고민들이 나왔다. “여성 리더가 단순히 직함을 가지는 것을 넘어, 조직 내에서 의사 결정력을 가지려면 어떤 구조적, 문화적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지”를 궁금해하는 질문도 있었다. 사회자가 대한여성과학기술회장을 맡고 있는 임 회장에게 마이크를 넘겼다.
임 회장은 “우리에겐 강력한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연구개발 계획 위원회 위원이 대부분 남성이고, 중요한 의사결정을 만드는 자리에는 이미 남성 네트워크가 견고하게 펼쳐져 있다는 게 그 이유다. 그는 “리더 자리에 여성을 추천할 수 있는 시스템이 강화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어제의 소녀, 내일의 소녀에게 용기를 불어넣다
2025년 APEC 정상회담의 주제는 ‘우리가 만들어가는 지속 가능한 내일’이다. APEC 2025 Women in STEM 심포지엄 역시 이 주제에서 확장해 ‘지속 가능한 미래를 위해 AI 분야의 여성들에게 힘을 불어넣다’를 주제로 삼았다. 그래서 이날 강연에는 인천시의 초·중·고등학생들이 청중으로 참가해 미래에 대한 꿈을 키우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행사장에서 만난 김윤하 양(인천 만월중 1)은 “강연자들이 얼마나 멋진 생각을 하며 자신의 길을 개척했는지 알 수 있었다”면서 “저도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저 자신을 발전시킬 기회를 얻었다”고 했다. 수학을 가장 좋아한다는 박새벽 양(인천 인주중 2)은 “보통 남학생들이 수학을 잘한다는 인식이 있다보니, 저도 늘 뒤처진다는 생각을 했었다”면서 “그런데 이 자리에 와서 용기와 힘을 얻었다”고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정예린 양(인천 갈산초 5)은 행사 수기를 통해 “처음에는 여성 과학자 리더가 되려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이번 행사를 통해서 그 생각이 바뀌었다”고 인천영재기자단 소식지에 소감을 남겼다.
이번 행사인 APEC 2025 Women in STEM 심포지엄을 주최한 한국여성과학기술인육성재단(WISET)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소관 공공기관으로, 한국 이공계 여성을 위해 설립됐으며, 이들을 위한 다양한 정책, 사업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고 있다. 이 날 행사에 참여한 문애리 WISET 이사장은 “앞으로도 WISET에서는 여성 과학기술인들을 위한 다양한 행사를 진행할 계획”이라면서 “여성과학기술인이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생태계를 만드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