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50년 전인 1975년 12월 24일, ‘한국표준연구소(현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이하 KRISS)’가 문을 열었다. 시작은 조촐했지만 이곳에서 진행된 연구는 한국을 과학 선진국으로 이끄는 발판이 됐다. 반세기 동안 한국은 일본에 시간을 빌려쓰던 나라에서 세계적 수준의 정밀한 시계를 직접 만드는 ‘표준 강국’으로 올라섰다. 이제 KRISS는 미래 과학을 준비하는 연구 기관으로의 발돋움을 준비하고 있다. 2025년, KRISS 개원 50년을 맞아 한국 측정 연구의 과거와 미래를 함께 살펴봤다.
측정의 가장 근본 단위는 무엇일까. 길이를 재는 미터(m)? 질량을 재는 킬로그램(kg)? 측정학 연구자들은 시간을 재는 초(s)가 가장 근본이라 설명한다. 길이나 질량 같은 다른 기본 단위들을 정의하려면 결국 시간을 가장 먼저 측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시간을 가장 잘 재는 사람들은 대전의 한국표준과학연구원 (KRISS)에 모여있다. 시간 측정의 수천 년 역사, 그리고 한국 측정의 반세기 역사를 돌아보기 위해 8월 26일, 개원 50주년을 맞은 KRISS에서 두 명의 시간 연구자를 만났다.
일본에서 빌리던 시간, 우리 손으로 직접 만들다
8월 26일 오후 2시, 한국표준과학연구원(KRISS) 원장실 옆 접견실에서 이호성 KRISS 원장과 이원규 KRISS 원자양자센싱그룹 책임연구원을 만났다. 이 원장은 KRISS에서만 40년 가까이 시간 측정 기술을 연구한, 한국 시간 연구의 상징과 같은 존재다. 한편 이 책임연구원은 현재 세계에서 가장 정밀한 기술로 평가받는 이터븀 광시계를 만들며 차세대 시간 연구를 이끌고 있다.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한국표준시’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습니다. 한국에서 표준시각을 측정할 여건이 안 됐어요. 그래서 일본 라디오 방송국에서 시보(시간 정보)를 받아 시간을 맞춰야 했죠.”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치고 현대 과학이 시작된 20세기 후반의 대한민국은 상황이 열악했다. 이 원장의 회고대로, 일본 시보에 맞춰 시간을 정하던 때에는 한국까지 전파 수신 상태에 따라 1000분의 4초 정도의 오차가 발생했다. 기술적 오차가 생기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자존심도 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KRISS가 ‘한국표준연구소’라는 이름으로 처음 문을 열었던 1975년, 가장 먼저 시작한 연구 중 하나가 한국표준시의 도입인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연구소 초대 소장이었던 김재관 박사가 의욕적으로 추진한 일이었죠.” 이 원장의 설명대로 1978년, 한국은 미국에서 세슘 원자시계를 도입했다. 이를 통해 한국에서 직접 측정한 시간을 표준으로 방송할 수 있게 됐다. ‘한국표준시’의 탄생이었다.
맨땅에서 신기술로 만든 세슘 원자시계 KRISS-1
“제가 연구소에 들어온 건 1986년이었습니다. 당시 기획부장으로 있던 원로 시간 연구자 고(故) 정낙삼 박사가 제 지도교수를 찾아와 ‘원자시계를 만들고 싶은데 제자 한 명을 보내달라’고 말씀하셨죠.”
한국표준시가 만들어졌어도, 세슘 원자시계 자체는 여전히 해외의 물건이었다. ‘한국도 원자시계를 직접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차츰 고개를 들었다. 그렇게 첫 원자시계를 만드는 연구를 시작한 핵심 멤버가 바로 이 원장이었다.
좋은 시계의 관건은 자연에서 변하지 않는 촘촘한 시간 눈금을 찾는 것이다. 원자시계는 원자가 에너지를 흡수하고 방출할 때 뿜는 전자기파의 고유 진동수를 기준 눈금으로 삼는다. 양자역학적 원리에 의해 이 고유 진동수는 변하지 않고 고정돼 있다. 원자시계 연구자들이 찾은 눈금은 세슘(Cs) 원자의 고유 진동수(전이 주파수)였다. “1967년, 국제도량형총회(CGPM)에서 1초의 정의는 세슘 원자의 고유 진동수로 정해졌어요. 1초에 91억 9263만 1770번 진동하는 이 진동수를 측정하는 것이 세슘 원자시계가 하는 일이죠.”
한국에서 원자시계를 만든다는 것은 이끌어 줄 선배 연구자 한 명 없는 맨땅에서 시작해야 하는 일이었다. 해외 논문을 빌려 복사해 읽고, 일본의 국가측정표준연구소(NMIJ) 등 해외 연구소에서 원자시계를 만드는 노하우를 전수받았다. “일본의 한 연구소에 갔을 때였어요. 방명록에 이미 많은 한국인의 이름이 있는 거예요. 그걸 보던 일본 연구자가 ‘왜 당신들은 구경만 하고 직접 원자시계를 만들진 않는거냐’고 했는데, 아, 화가 솟는 거예요. 제대로 만들어야겠다고 이를 꽉 물었죠.”
아름다울 만큼 단순한 원자시계의 원리를 구현하는 일은 힘들고 복잡했다. 이는 이 원장을 비롯한 시간표준그룹 연구자들의 몫이었다. 앞에서 세슘 원자의 고유 진동수가 변하지 않는다고 말했던가? 이 책임연구원이 설명을 덧붙인다. “사실 진동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변수는 엄청 많습니다. 주변의 온도, 전기장, 자기장, 중력에 따라 진동수가 바뀔 수 있어요. 이 모든 변수를 잡아내는 싸움이었죠.”
특히 세슘 원자의 진동수를 정확히 측정하려면 원자를 안정된 상태로 고정하는 게 중요했다. 당시까지 이를 위한 핵심 부품으로 영구자석이 널리 사용됐다. KRISS 연구팀은 영구자석 대신 레이저로 원자를 고정하기로 결정했다(이 신기술은 나중에 세계 각지의 다른 원자시계에도 채택된다).
이렇게 진행된 연구 끝에 한국 최초의 세슘원자시계인 ‘KRISS-1’이 2008년 모습을 드러냈다. 연구 시작 20년 만의 성과였다.
우주 나이보다 더 정밀한 이터븀 광시계 향해
한국 최초의 세슘 원자시계 KRISS-1은 불확도를 10-14초 수준으로 줄였다. 쉽게 말하면 100조분의 1초까지 정확하다는 뜻이다. 이렇게까지 정확한 시계가 필요있을까 싶지만, 이 책임연구원은 “세계협정시(UTC) 생성에 참여할 정도의 불확도를 목표로 했다”고 밝혔다. UTC는 국제 표준 시간의 기준으로 쓰이는 시각이다. 세계에서 가장 정확한 시계들이 측정한 시간을 기준으로 만들어진다.
KRISS-1이 만들어지는 사이에도, KRISS 시간측정그룹 연구자들은 새로운 메커니즘의 시계를 만들었다. 새로운 ‘원자 분수(atomic fountain)’ 방식을 도입한 원자시계는 이 원장이 만든 KRISS-1보다 100배 정확한 10-16초까지 불확도를 끌어내렸다. 그렇다면 지금 KRISS에서 만든 가장 정확한 시계는 무엇일까. “여기 있는 이원규 책임연구원이 만드는 중인 이터븀 광시계입니다.” 이 원장이 자연스레 후배 연구자에게로 이야기의 배턴을 넘긴다.
이 책임연구원이 연구하는 ‘이터븀 광시계’의 기본 원리는 세슘 원자시계와 비슷하다. 단지, 세슘 원자의 고유 진동수보다 훨씬 많이 진동하는 이터븀(Yb) 원자를 쓴다는 점이 다르다. 이터븀 원자의 고유 진동수는 1초에 518조 2958억 3659만 863.6번에 달한다. 고유 진동수가 세슘보다 거의 5만 6000배 높은 셈이다. “진동수가 높은 만큼 측정하는 자의 눈금이 촘촘하다 볼 수 있어요. 그만큼 정확한 시간 측정이 가능하죠.” 고유 진동수가 높아진 만큼 원자의 전자 상태를 전이시킬 때 쓰는 전자기파의 진동수도 높아졌다. 세슘 원자시계 때는 마이크로파를 썼지만 이제는 가시광선을 쓴다. “이름에 ‘빛’이 들어가는 이유입니다.”
KRISS에서 만든 첫 광시계, ‘KRISS-Yb1’은 2014년 모습을 드러냈다. 이후 개선을 거듭해 원자 분수 시계보다 10배 더 높은 10-17 수준까지 불확도를 낮췄다. 20억 년에 1초 정도의 오차가 생기는 수준이다. KRISS-Yb1은 그 정확도를 바탕으로 2021년부터 꾸준히 세계협정시 생성에 참여 중이다. 이 또한 KRISS-1처럼 2002년부터 시작해 20년의 연구 끝에 나온 성과였다. “정확도가 세계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두 연구자가 자신만만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이렇게 정확한 광시계를 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KRISS 시간측정그룹은 계속해서 더 정밀한 시계를 만들고 있다. 지금은 ‘KRISS-Yb2’를 만들고 있는 이 책임연구원이 말했다.
“2025년 말 개발을 목표로 만드는 중인 KRISS-Yb2는 주변의 온도를 제어해 더 정밀하게 만들었습니다. 4×10-18초의 불확도를 목표로 하고 있어요.” 우주의 나이(약 138억 년) 동안 생기는 오차가 1 초 수준이라는 뜻이다.
KRISS에서 광시계 연구에 박차를 가하는 이유는 2030년으로 예정된 제29회 국제도량형총회(CGPM)에서 시간의 정의가 바뀔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2018년 많은 국제단위계의 정의가 바뀌었지만 시간은 바뀌지 않았어요. 이미 자연상수인 세슘의 고유 진동수를 기준으로 정의됐기 때문이죠. 이후로 훨씬 정확한 광시계 기술이 등장했고, 늦어도 2034년 전에는 광시계를 기반으로 한 새 정의가 확정될 겁니다.”
측정에서 응용까지, KRISS의 다음 50년
“원장님 말씀을 듣고 보니 신기하네요. 시계를 만드는 데에는 항상 20년이 걸렸어요.”
한때 같은 팀에서 함께 연구했던 선후배 과학자는 회포를 풀듯 인터뷰 사이사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한국의 연구 풍토에서 20년 동안 한 연구를 이어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그 중요성을 알기에 꾸준히 연구를 지원해 온 자세가 KRISS의 지난 50년을 지탱해 온 저력 아니었을까. 이 원장에게 앞으로 다가올 50년은 어떻게 준비하고 있는지 물어봤다. “측정은 물론, 측정을 넘어선 과학 연구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는 답했다.
예를 들어 원자시계는 중력을 정밀하게 측정하는 기반 기술이 된다. 일반 상대성이론에 따라 중력이 커지면 시간이 느려지기 때문이다. 이를 한 번 더 응용하면 고도를 측정할 수 있다. 지구 질량의 중심에서 떨어진 거리에 따라 중력이 미세하게 바뀌니 말이다. “앞으로 50년 동안은 기본적인 측정 임무와 함께 응용 분야에서도 과학기술 발전을 선도하려 합니다.”
KRISS의 측정 연구는 생활부터 미래 기술까지, 우리가 예상치 못한 곳곳에서 쓰이고 있다. KRISS의 측정 연구가 생활과 미래 기술로 어떻게 확장되는지는 다음 파트에서 다룬다.
“하나의 시계를 만드는 데만 20년 정도 걸렸어요. 지금은 정확도가 세계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용어 설명
측정값에 존재하는 불확실성의 정도를 나타내는 값. 측정 자체의 불확실성이나 측정 도구의 분해능 문제로 생긴다. 측정값과 기준값의 차이인 오차와는 다른 개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