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난수, 우연을 도입하기 위해 만든 장치 ●
난수(亂數)는 ‘특정한 순서나 규칙을 가지지 않는, 연속적인 임의의 수’를 의미합니다. 여러분도 쉽게 난수를 만들 수 있습니다. 눈을 감고 아무 숫자나 주루룩 써보세요. 컴퓨터가 있다면 엑셀 프로그램을 켜고 “=rand()”를 입력해 보던가요. 엑셀에 내장된 랜덤 함수가 자동으로 0에서 1 사이의 실숫값을 출력해 줄 겁니다. 축하합니다. 여러분은 방금 난수를 만드는 데 성공했습니다.
방금 만든 난수를 보면서, 여러분은 이 난수를 어디에 쓸지 궁금할 겁니다. 이런 상황을 생각해 봅시다. 토요일 저녁, 당신은 오랜만에 친구들과 삼겹살집에서 만났습니다. 배불리 먹고 계산을 하려는데 친구 한 녀석이 옆에서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한 명한테 몰아주기 하는 거 어때?” 좋습니다. 어떻게 공평하게 한 명을 뽑을 수 있을까요? 해결책 중 하나는 사다리타기 프로그램입니다. 사다리타기는 무리 중 한 명의 희생자를 공평하게 뽑을 수 있죠. 난수의 아이디어도 여기서 출발합니다. 난수는 무작위적인 사건, 즉 ‘우연’을 수학적으로 도입하기 위해 만들어진 장치거든요.

고대 그리스의 유물인 ‘클레로테리온’. 아테네 시민 중 공직자와 배심원을 선출하기 위해 쓰였던 무작위 제비뽑기 장치다.
인류는 고대부터 제비뽑기나 주사위 등 무작위성을 만들어내는 도구를 활용했다.
● 신의 영역이던 우연을 길들이다 ●
인류는 오래전부터 ‘무작위성’의 필요성을 깨닫고 다양한 도구를 사용해 무작위성을 추구해 왔습니다. 그 기원을 찾기 힘들 정도로 오래된 대표적인 수단이 ‘제비뽑기’와 ‘주사위’입니다. 제비뽑기는 동일하게 생긴 제비 여러 개 중 하나를 고르는 방식으로, 주사위는 모든 면이 동일한 면적을 가진 정다면체를 굴려 윗면에 나오는 수를 택하는 방식으로 하나의 가능성을 선택합니다. 수학의 측면에서 보면 제비뽑기와 주사위는 고전역학을 이용한 초기 단계의 ‘난수 발생기’라 볼 수 있습니다. 물론 고를 수 있는 경우의 가능성은 명확한 한계가 존재하지만요.
보드게임부터 전쟁에 이르기까지 결과를 쉽게 예측할 수 없는 선택을 해야 할 때, 주사위는 신의 선택을 대리하는 존재로 분했습니다. 이미 기원전 49년, 로마의 군인이자 정치가였던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쿠데타를 일으키기로 결심하고 루비콘강을 건너면서 “주사위는 던져졌다”라는 말을 남기지 않았습니까.
우연성은 이후 두 가지 방향에서 학문적으로 연구되기 시작했습니다. 한 방향은 17세기 떠오른 확률론입니다. 수학자이자 자연철학자로 유명한 블레즈 파스칼과 피에르 드 페르마와 같은 사람들이 도박이나 보험 문제를 수학의 눈으로 들여다보면서 확률론을 만들어 나갔죠. 또 다른 방향은 19세기에 정립된 통계학입니다. 통계학은 수많은 데이터를 분석해 보이지 않던 경향성을 찾아내는 학문이었습니다. 캐나다의 과학철학자인 이언 해킹은 인류가 이 두 가지 흐름을 통해 ‘우연을 길들였다’고 분석했죠. 신의 손에 맡겨졌다고 여겨지던 우연이 인간이 합리적으로 예측할 수 있는 통제권으로 들어왔다는 겁니다.
난수가 처음으로 실용적으로 쓰인 분야는 통계학이었습니다. 통계학에서는 방대한 데이터를 다 검토할 수 없기 때문에, 데이터 중 몇 가지만 뽑아 분석하는 ‘표본 추출’을 합니다. 이때 데이터를 그 누구의 편견이나 선입견에 영향받지 않고 뽑는 ‘무작위 추출’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무작위 표본 추출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무의식적으로 친숙한 성별이나 이름을 뽑아 편향이 생길 수도 있죠. 난수표는 무작위 추출을 돕기 위해 탄생했습니다. 1927년, 영국의 통계분석가로 활동하던 L.H.C. 티펫은 최초로 난수표를 공식적으로 출판했습니다. 이 난수표에는 총 4만 1600개의 무작위 숫자가 적혀있습니다. 통계분석가들은 데이터에 숫자를 매긴 후, 이 난수표에서 난수를 골라 그에 맞는 데이터를 뽑는 방식으로 사용했죠.
이후로 난수표는 20세기를 거치며 발전을 거듭했습니다. 더 크고 방대한 난수표가 만들어졌고, 이후에는 난수를 만드는 수학적 알고리즘도 만들어졌습니다. 엑셀 프로그램에 포함된 랜덤 함수 또한 난수 알고리즘을 이용했죠. 정리해 보면, 난수는 공평한 우연을 만들기 위한 노력의 산물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주사위가 하던 일을 좀 더 수학적으로 정리된 방식으로 다듬은 게 난수란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의외의 문제가 하나 생깁니다. 수학 알고리즘으로 만들어지는 난수는, 엄밀히 말해 ‘진짜’ 난수가 아닙니다.

이탈리아 화가 카라바조가 1549년경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도박꾼(The Cardsharps)’. 사기도박꾼이 뒤편에서 몰래 카드를 꺼내고 있다. 도박은 17세기 확률론이 수학의 한 분야로 성장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이후, 신의 뜻으로 여겨지던 ‘우연’은 점차 인간이 예측할 수 있는 성질의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 우리가 아는 난수는 가짜다? ●
완벽한 난수, 완벽한 우연을 만들기란 쉽지 않습니다. 제비뽑기는 다른 사람들 모르게 제비를 바꿔치기해서 원하는 결과를 만들 수 있죠. 주사위도 섬세하게 조작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주사위를 만들 때 6이 적혀있는 면의 반대쪽 면에 무거운 금속 덩어리를 넣습니다. 이러면 무거운 쪽으로 무게중심이 쏠려 해당 면이 바닥으로 갈 확률이 높아집니다. 결과적으로 6이 더 자주 나오죠. 그렇다면 수학을 이용하는 난수 생성 알고리즘은 안전할까요?
“근본적으로 컴퓨터는 난수를 만들지 못합니다.”
6월 30일 대전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본원에서 만난 박경환 지능형센싱반도체연구실 실장 겸 책임연구원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컴퓨터는 입력된 정보가 같으면 항상 동일한 답을 출력하도록 만들어진 기계이기 때문입니다.”
이걸 결정론적 알고리즘이라 부릅니다. 가장 단순한 형태로는 수학 함수를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실제로 난수를 만드는 수학적 알고리즘은 특별한 함수를 사용합니다. 끝없이 숫자가 만들어지는 함수의 결괏값 중 일부분을 떼내 보여주는 겁니다. 이렇게 컴퓨터 알고리즘을 통해 만들어지는, 무작위적인 값‘처럼 보이게’ 만든 난수를 ‘의사난수’라 부릅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의사난수의 결괏값은 보통 방대하기 때문에 완전한 난수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난수를 계속 요구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결국 같은 난수가 다시 나올 수도 있습니다.” 또 다른 문제도 있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난수를 만드는 함수를 발견하거나 풀어버린다면, 어떤 난수가 나올지 예측할 수 있게 됩니다. 난수가 더는 우연을 보장하지 못하는 상황이 오는 거죠.
친구들과 저녁값을 계산하는 등의 사소한 일에서는 의사난수를 사용해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 난수의 가장 중요한 사용처는 보안입니다. 통신 등 암호화 과정에서 난수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만약 의사난수 생성 알고리즘이 뚫리게 되면 비밀 통신은 물론 은행이 해킹당하는 등 걷잡을 수 없는 사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물론 다른 방식으로 난수를 만드는 방법이 없는 건 아닙니다. 이를 의사난수발생기(PRNG)와 비교해 ‘순수난수발생기(TRNG)’라 부르는데, TRNG는 주변의 물리적 특성을 이용해 난수를 만듭니다. 예컨대 반도체 소자의 열 잡음, 외부의 전자파나 빛, 심지어는 마우스의 움직임 같은 신호를 사용해서 난수를 만들죠. TRNG는 자연 현상에 기반을 두니 예측 불가능한 난수를 만들 수 있지만, 대신 속도가 느리고 많은 양의 난수를 만들기 힘듭니다. 현대 사회는 전 분야에서 엄청난 양의 난수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로 생성 속도가 빠른 의사난수를 사용하는 겁니다.

에니그마에는 난수와 대응된 코드북이 있어 암호를 만드는 데 쓰였다.

● 진짜 난수 위해 도입한 ‘신의 주사위놀이’ ●
그래서 최근 난수 생성 연구자들은 다시 수학에서 물리학으로 눈을 돌리고 있습니다. 예전과 차이가 있다면 고전역학이 아니라 양자역학을 이용한다는 점이죠. 이를 ‘양자난수발생기(QRNG)’라 부릅니다. 2018년부터 2021년까지 박 책임연구원이 한국원자력연구원 연구팀과 함께 연구를 진행한 분야도 바로 QRNG입니다. 정말로 무작위로 발생하는 양자역학적 현상을 이용하는 겁니다.
주변 정보를 완벽히 얻고 이를 정확히 계산하면 공이 미래에 어디로 굴러갈지 예측할 수 있는 고전역학의 세계와 다르게, 양자역학이 그리는 세계는 확률적으로 작동합니다. 뚜껑을 열어 관찰하기 전까지는 고양이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수 없다는 ‘슈뢰딩거의 고양이’ 비유가 양자역학의 특성을 잘 보여주죠. 일찍이 결정론적 세계의 수호자였던 아인슈타인은 “신은 주사위놀이를 하지 않는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틀렸습니다. 자연은 무작위성 자체를 품고 있고, 상자 속 고양이의 생존 여부는 신도 모릅니다. QRNG는 이런 특성을 이용해서 진짜 난수를 만듭니다.
박 책임연구원이 개발했던 QRNG를 예로 들어볼까요. “원래는 한국원자력연구원과 함께 방사성 원소를 사용한 반영구적 배터리를 만드는 연구를 했습니다. 그러다 2017년쯤에 방사선을 사용해서 난수를 만든다는 기사를 읽고 시제품을 만들어보기로 했죠.”
불안정한 방사성 동위원소는 붕괴를 통해 방사선을 방출하며 더 안정한 원소로 바뀝니다. 박 책임연구원의 연구팀에서는 QRNG에 니켈의 동위원소인 니켈-63을 넣었습니다. 니켈-63이 붕괴하면서 베타선(전자)을 방출하는데, 이 붕괴 사건 또한 확률적으로 발생합니다. 니켈-63의 반감기를 예측할 수는 있을지언정, 실제로 언제 니켈-63 원자 하나가 붕괴해 전자를 뿜어낼지, 검출기 어느 위치에 전자가 닿을지는 완전히 무작위적으로 이뤄진다는 거죠. QRNG는 방출되는 전자의 무작위성을 난수원으로 사용합니다. 연구팀은 이 전자의 검출 신호를 타이머와 결합해 난수로 바꿨습니다. 양자난수 변환 칩 내부에는 시계처럼 일정하게 돌아가는 숫자 카운터가 들어있습니다. 검출 신호가 발생할 때 숫자 카운터를 읽으면 무작위적인 난수가 생성된단 겁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수열을 진짜 난수라 할 수 있을까요? 박 책임연구원은 실제로 연구팀이 만든 난수가 미국 국립표준기술연구소(NIST)의 난수 표준 검증시험인 ‘엔트로피 소스 적합성’과 ‘암호화용 난수 적합성’ 테스트를 통과했다고 말했습니다. ‘진짜 랜덤’에 가까운 고품질 난수란 거죠.
박 책임연구원은 QRNG로 만든 난수는 난수의 세 요소를 충족시킨다고 설명했습니다. 우선 양자역학적 현상을 통해 만들어진 난수는 예측이 불가능합니다. 다음으로 이 난수는 과거에 일어난 사건에 영향받지 않고 독립적으로 만들어집니다. 마지막으로 특정 수치로 확률적으로 치우치지도 않습니다. 박 책임연구원은 한 가지 장점을 더 언급했습니다. “전자파나 빛을 사용하는 TRNG는 상황에 따라 사용하는 잡음의 크기가 바뀔 수도 있어요. 하지만 양자역학적 현상은 환경 변화와 관계없이 일정하게 일어납니다.”
ETRI 양자난수발생기의 작동원리
QRNG를 구현하는 방법은 이 외에도 다양하다.

● 보이지 않는 난수, 갈수록 중요해진다 ●
박 책임연구원 팀에서 만든 방식 말고도 양자역학적 현상을 다양한 원리로 응용해 QRNG를 만들 수 있습니다. 당연히 세계 각국은 여러 장점이 있는 QRNG 연구에 뛰어들고 있죠. 이미 2000년대 초부터 스위스, 일본, 중국 등 다양한 나라에서 여러 방식으로 QRNG를 만들고 있습니다. 지난 6월 NIST 연구팀이 국제학술지 ‘네이처’에 발표한 연구는 진짜 난수 생성은 물론, 난수의 진실성까지 검증한 사례입니다. doi: 10.1038/s41586-025-09054-3
NIST 연구팀은 얽힌 광자쌍을 이용해 난수를 만들었습니다. 양자역학에서 ‘얽힘’은 두 입자가 서로 떨어져 있어도 상호작용하는 현상입니다. 얽힘 상태에서 한 입자를 관찰하면 다른 입자의 상태도 정해지죠. 이 얽힘 상태는 ‘벨 부등식’이라 알려진 통계적 상관관계를 위반합니다. 다르게 생각하면 벨 부등식이 위반되는 상황을 확인하기만 하면 진짜 양자적 무작위성을 확인한 셈이죠.
그래서 NIST 연구팀은 얽힌 광자쌍의 편광을 따로 관측해 벨 부등식이 위반되는지 테스트했습니다. 그리고 이 실험 결과를 통해 난수를 만들었습니다. 여기까지는 NIST 연구팀이 2015년과 2018년에 이미 진행한 연구 내용입니다. 이번에 발표된 연구의 특기 사항은 난수를 만드는 과정에서 블록체인 기술을 도입했다는 겁니다. 블록체인으로 난수의 생성 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제 제비 바꿔치기나 주사위 조작은 통하지 않습니다.
박 책임연구원은 신뢰할 수 있는 난수 생성 기술은 앞으로 더욱 중요해질 것이라 말합니다. 앞서 설명한 금융, 통신, 보안은 물론이고 난수는 정말 상상하지 못한 분야에서도 널리 쓰이기 때문입니다. “복권을 발매할 때도, 게임에서 랜덤 박스를 열어봤을 때도, 심지어는 카지노에서 운영하는 슬롯머신에도 난수발생기가 필요합니다. 생성형 AI 학습에도 난수가 사용돼요. 누구도 예측할 수 없어야 한다는 측면에서 난수가 정말 많이 사용됩니다.”
여기에 하나 더 추가하자면, 난수 생성은 군사적 가치도 매우 큽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이 사용하던 암호 장비인 에니그마를 활용할 때도 난수표가 사용됐습니다. 지금도 세계 많은 나라의 군대에서 양자 난수 생성 기술을 연구 중이라고 박 책임연구원은 말합니다(이 말을 듣고 보니, 2015년에 발표된 NIST의 양자역학 연구를 미국의 국방고등연구계획국(DARPA)에서 후원했다는 점 또한 흥미롭게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박 책임연구원의 연구팀 또한 2025년부터 새로운 QRNG 연구 프로젝트를 시작합니다. “ETRI의 칩 제조 기술을 이용해 이전 시제품보다 더 작고 더 빠른 QRNG 칩을 만들려 해요. 앞으로 2년 안에 세계적으로 경쟁력 있는 QRNG를 만드는 게 목표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