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생 시절, 수학 교구를 만지며 노는 걸 좋아했다. ‘창의력을 키워주는 교구를 디자인하는 교육 콘텐츠 회사를 차려야지!’란 꿈도 꿨다. ‘과학동아’도 이때 처음 접했다. 과학실에 늘 비치돼 있어서, 쉬는 시간과 방과 후에 펼쳐보곤 했다.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 과학동아에 적지는 않았지만, 세상에 이런 주제들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흥미로웠다. 기본 입자가 뭔지도 모른 채로, 힉스 입자에 대한 기사를 반복해서 읽었던 기억도 난다. 이해가 되진 않았지만 그때부터 묘하게 끌렸다.

공학과 디자인에서 물리학으로
그러던 중 창의·융합·글로벌이 키워드인 UNIST의 겨울방학 캠프에 참가해, 이 학교에선 공학, 경영학, 디자인의 세 분야를 함께 배울 수 있다는 소개를 들었다. 여기서 공부하면 좋아하는 수학을 배우며 디자이너와 창업가로서의 역량도 키울 수 있겠다고 생각해 UNIST 개교 초기에 5기로 입학했다. 기계공학과 산업디자인을 함께 전공했다.
입학하자 전공 선택 전인 1학년 때의 기초과학 수업들이 의외로 가장 재밌었다. 기계공학은 재미가 없진 않았지만 지적 흥미가 자극되지 않았고, 디자인 공부는 생각보다 적성에 맞지 않았다. 창업도 해봤지만 비슷했다. 결국 졸업 후엔 다양한 일을 시도해봤다. 취업도 해보고, 공공 연구소의 인턴도 하다가 대학원 석사과정을 시작했다.
뚜렷한 목적 없이 뭔가 해보자는 마음이었는데, 이상하게 논문 읽고 실험하고 데이터 분석하는 과정이 재밌었다. 그저 재밌다는 이유로 계속하다 보니 박사과정까지 이어졌다. 석사과정에선 ‘기하역학’이란 분야에 관심이 생겼다. 기하역학은 물체가 공간 속에서 움직일 때 생기는 여러 제약 조건을 수학적으로 표현하고, 이 조건에서의 운동을 연구한다. 이 분야를 더 깊게 공부하고 싶어서 관련 연구실들에 직접 연락했다.
그중 유일하게 답장이 온 미국의 한 연구실에서 박사과정을 시작했고, 지금은 미국 조지아공대 물리학과에서 모래 같은 입자성 물질이 움직이는 방식이나 자발적으로 움직이는 시스템들을 연구 중이다. 물리학과의 연구실에서 공부하다 보니 양자역학, 통계역학 등 물리학의 핵심 개념들을 자연스레 접했고, 이론적인 이해가 실험 연구에 얼마나 중요한지도 체감했다. 물리학 자체에 점차 흥미가 커져서, 전공도 물리학과로 바꾸게 됐다.

2 2023년 미국 조지아공대의 정량 생명과학 워크숍에서 포스터 발표 중이다.
규칙을 찾아가는 연구의 기쁨
현재 연구 중인 주제는 입자성 물질의 ‘집단적 운동(collective dynamics)’이다. 모래처럼 수많은 입자들이 어떻게 상호작용하며 운동하는지, 혹은 각 입자가 에너지를 생산하며 스스로 운동할 수 있을 때에 전체 시스템은 어떤 특성을 보이는지 탐구한다.
이런 집단적 운동의 연구는 실험과 이론을 아우른다. 센서를 부착한 로봇을 만들어 실험할 때도 있고, 통계역학, 유체역학, 제어이론 등의 이론적 틀을 활용해 모델을 만들 때도 있다. 하는 일이 매일 달라서 지루할 틈이 없다. 여러 방식으로 수집, 분석한 데이터 속에서 반복된 패턴이나 새 규칙을 발견하는 과정은 늘 흥미롭다.
‘규칙을 찾는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최근에 자주 떠올리는 의문이다. 사람들은 자연 현상에서 패턴을 관찰하고 그 안에서 보편적인 규칙을 도출하고자 한다. 그런 시도들이 모여 이론, 과학이 된다. 행성의 움직임을 관측한 결과들이 누적돼 만유인력의 법칙이 탄생했듯 말이다. 하지만 명리학, 관상학도 데이터에 근거한다며 유사하게 주장하는 경우가 있다.
그렇다면 과학과 미신을 가르는 경계는 무엇일까? 통제된 환경, 재현 가능한 실험, 예외를 대하는 태도와 같은 과학 고유의 원칙이 그런 경계일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집단적 운동에 관한 연구는 여전히 규칙을 ‘찾아가는’ 단계에 있다고 느낀다. 그래서 자주 자문한다. 지금 관찰한 현상이 정말 규칙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다른 사람도 이 규칙에 납득할 수 있을까? 이 규칙은 자연의 법칙일까, 인간의 착각일까? 이런 고민은 연구자인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며, 더 엄밀하게 실험을 설계하도록 이끈다. 이 과정 자체가 무척 즐겁다.

목표와 이유보다 중요한 것, 공리
동기나 목표에 관한 질문을 받으면, “딱히 정해둔 목표는 없어요”라고 답하곤 한다. 마음이 가는 대로, 재미와 의미가 있다고 느낀 방향으로 간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잘 지낼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예전엔 끊임없이 원인을 찾는 질문을 던졌다. ‘학교는 왜 다녀야 하지?’ ‘이 일을 왜 해야 하지?’ 지금은 나만의 ‘공리’를 정하지 않은 탓에 혼란스러웠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공리는 수학에서 ‘증명하지 않아도 옳다고 간주하는 출발점’이다. 예를 들어 A=B이고 B=C이면, A=C이란 명제는 굳이 의심하지 않고 참으로 여긴다.
마찬가지로 내가 어떤 일을 하며 즐겁다면, 그 감정을 굳이 증명하려 하지 않고 출발점으로 삼을 수 있다. 그렇게 출발점부터 설정하면, 다음 일들은 훨씬 자연스럽게 풀려나간다. 명확한 목표를 세우기 위해 그 이유를 고민할수록 더 막막해지는 듯하다. 지금은 관심이 일어나는 쪽으로 움직이며 사는 방식이 내 삶의 공리라고 느낀다.

내 기준을 세워가는 공부의 가치
삶은 예측할 수 없는 일들의 연속이다. 지금 하고 있는 고민이 나중에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 모른다. 나도 처음엔 교구 디자이너가 되고 싶었고, 대학원에 진학할 때는 박사과정까지 하게 될 줄 몰랐다. 미국으로 유학을 올 때도 전공을 물리학으로 바꾸게 될 줄 몰랐다.
어릴 때 물리가 쉽지 않았지만, 왠지 ‘좋아하는 감정’은 늘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과학동아가 심어준 호기심이 무의식적으로 진로에 영향을 줬을지도 모른다. 물리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지금의 나를, 그때는 상상도 못했으니까.
재미있는 건 가끔 채용 공고 사이트에서 동아사이언스 채용공고 메일을 받는다. 진로를 고민하던 시절, 글을 읽고 쓰길 좋아한 까닭에 과학 기자도 고려했었고, 그때 가장 먼저 떠오른 회사가 고등학생 때부터 읽은 과학동아를 내는 동아사이언스였다.
당장 모든 걸 결정하진 않아도 괜찮다. 대신 자신이 좋아하는 것, 궁금한 것을 따라가다 보면, 각자 자신만의 길을 찾을 것이라고 믿는다. 다양한 시도를 해보며, 그런 경험 속에서 ‘이건 아니다’ ‘이건 괜찮다’란 자신의 기준을 세워가는 과정이야말로 의미 있는 공부다.
나만의 과학동아 활용법
Q.과학동아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기사가 있나요?
물이 벽에 튄 모습이나 물방울의 움직임을 예술적으로 포착하는 유체 사진가에 대한 2012년 3월호 기사다(지금 다시 보니 그 사람도 물리학자였다!). 초록색, 파란색으로 도배한 방에서, 물방울에 지구가 비치게 해서 찍은 사진이 너무 신기했다. 그 후로 음료수를 따르거나 물방울이 튈 때, 유심히 보게 됐다. 여고를 다녀서 물리 II를 선택한 친구가 거의 없었는데, 사진학과를 꿈꾸던 친구를 이 기사로 꾀어서 함께 물리 II를 공부한 추억도 있어 더욱 기억에 남는다.
Q.과학동아를 실제로 어떻게 활용하고 있나요?
고등학교 졸업 후엔 뉴스레터를 받아보기도 했고, 요즘은 수업이나 발표 준비를 할 때 필요한 주제를 검색해 찾아본다. 동생들이 학교 수행평가 준비로 조언을 구할 때도 과학동아 기사가 주제를 쉽게 설명해줄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된다.
Q.과학동아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여러분이 과학동아를 읽은 계기가 궁금하다. 나처럼 눈에 띄어서 읽은 분도 있고, 과학에 관심이 커서 읽은 분도 많을 것이다. 지금은 그 이유를 몰라도, 삶의 어느 순간에 과학동아를 읽은 기억이 퍼즐 조각처럼 맞춰질 것이다. 나 역시 과학동아에 기고할 줄은 꿈에도 몰랐고, 물리학 박사과정을 밟으며 전에 읽은 기사들을 떠올릴 줄도 몰랐다. 그래서 이 글의 모든 독자께 반갑다는 인사를 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