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핵무기로 2차 세계 대전을 끝낸 미국은 전쟁 후에는, 아이러니하게도 핵무기를 걱정하는 신세가 됐다. 이념으로 서방과 갈라선 구 소련과 중국이 핵무기를 개발하는 것을 두려워한 것이다. 당시 미국 정치인과 정보부가 고안해낸 해결책은 ‘기술적 장벽’이었다. 핵무기를 개발하는 것이 원체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이 기술적 장벽이 핵무기 확산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특히 우라늄을 농축하는 원심분리 기술이 큰 걸림돌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최근 이어지고 있는 북한 핵실험 사태를 볼 때 이런 기조는 현대와 맞지 않으며, 따라서 기술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막아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고농축 우라늄만 있으면 핵무기 개발 끝!
우라늄은 포신형 핵폭탄 제조에 필수적인 재료다. 포신형 핵폭탄은 히로시마에 떨어진 ‘리틀보이’와 같은 형태로, 우라늄 동위원소 중 우라늄-235를 핵연료로 쓴다. 우라늄-235는 중성자와 반응해 작은 원소로 쪼개지면서(핵분열) 2~3개의 중성자를 내놓는다. 만약 주변에 충분한 양(임계질량)의 우라늄-235가 있으면, 중성자들이 또 다른 우라늄과 연속적으로 반응해 핵분열이 기하급수적으로 일어난다. 만약 임계질량 이하의 우라늄 두 덩이를 따로 떼 두었다가 합치면, 임계질량에 도달해 폭탄을 만들 수 있다는 이야기다. 실제로 포신형폭탄은 폭발 직전에 화약을 터뜨려 두 덩이를 합친다. 별도의 구조가 필요 없기 때문에 설계가 아주 쉽고 실패할 확률도 매우 낮다.
우라늄 폭탄을 제조하기 위해서는 우라늄-235가 90% 이상인 고농축 우라늄이 필요하다. 하지만 자연계에 존재하는 우라늄의 99% 이상은 우라늄-238이다. 때문에 기체원심분리법을 통해 자연 우라늄에서 우라늄-235를 농축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미국 정부가 기술적 장벽으로 꼽은 부분도 바로 이 부분이었다. 1944년에 발간된 미국중앙정보국(CIA) 보고서는 “핵무기를 설계하는 것은 그 자체로 어려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핵연료를 구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이 기술을 철저히 통제하면 핵확산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다른 나라보다 한 발 먼저 핵무기를 개발했던 미국도 초기에 우라늄 농축 기술 개발에 상당한 애를 먹었다.
중국과 소련은 기술적 장벽의 예외
하지만 미국의 장밋빛 예상은 소련에 의해 산산이 부서졌다. 1949년 8월 소련이 처음으로 핵폭탄 실험에 성공한 것이다. 믿을 수 없는 이 소식에 미국의 해리 트루먼 대통령도 처음에는 핵발전소가 폭발한 것일 거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소련의 경우에는 스파이가 구해온 맨해튼 프로젝트의 비밀 정보가 핵무기 개발에 큰 역할을 했다.
15년 뒤인 1964년에는, 중국이 최초로 핵 실험에 성공하며 미국을 충격에 빠뜨렸다. CIA는 당시에 이런 기록을 남겼다. “서방국가를 제외한 그 어떤 곳에서도 기체원심분리법으로 무기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미 핵무기를 개발한 소련에도 대규모로 핵무기를 생산할 수 있는 원심분리 시설은 존재하지 않으며, 소련이 이 기술을 중국에 건네준 흔적도 없다. 우리는 중국이 핵무기를 자체 생산할 수 있는 기술을 가지고 있다고 도저히 믿을 수 없다.”(CIA의 1965년 보고서 ‘Communist China’sadvanced weapons ogram’) CIA의 바람과는 달리 소련은 당시에 이미 우라늄을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는 시설을 비밀리에 갖추고 있었다. 그것도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로.
핵무기에 필요한 기술은 이미 반세기 전에 개발됐다. 이 기술들이 제자리걸음을 걷는 동안 다른 과학기술은 엄청난 발전을 이뤘고, 이제는 핵무기를 개발하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중국과 소련의 핵개발에도 불구하고 과학적 장벽이 핵확산을 방지할 것이란 기대는 사그라들지 않았다. 소련과 중국 같은 초강대국을 제외하고는, 핵무기를 개발할 수 있는 기술력과 자원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소련과 중국이 핵실험 노하우를 다른 곳에 전해주는 것을 막고, 고농축 우라늄 같이 중요한 재료를 철저하게 관리하면 핵확산을 막을 수 있을 것으로 예측했다. 때문에 서방세계는 핵확산방지조약을 맺고 핵원료의 유출입을 보다 철저히 감시했다. 지금도 미국은 두 가지 조건만 만족시키면 과학이 핵확산을 막아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더 이상 기술적 장벽이 막을 순 없다
하지만 최근 이런 인식에 변화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원자력공학과의 핵무기 연구자인 스캇 켐프 교수는 e메일 인터뷰에서 “핵무기에 필요한 기술들은 반세기 전에 이미 개발된 것”이라며 “이 기술들이 제자리걸음을 걷는 동안 다른 과학기술은 엄청난 발전을 해왔다”고 말했다. 그는 “예전에 엄청나게 어렵다고 느껴졌던 기술들이 이제는 별것 아닌 경우가 많다”며 “핵무기도 예외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예컨대 맨해튼 프로젝트 팀은 캐드(CAD) 같은 컴퓨터 설계 프로그램을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손으로 일일이 부품을 만들어 설계를 해야 했다. 켐프 교수는 “요즘 고등학생들이 사용하는 것보다 못한 도구로 핵폭탄을 만들어야 했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가 설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 핵무기를 보유하지 않은 나라의 기술자들을 인터뷰하고 자료를 꼼꼼히 조사했다(doi:10.1162/ISEC_a_00159). 특히 미국정부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우라늄 농축 기술에 초점을 맞춰 조사를 진행했다. 그결과 네덜란드, 독일, 호주, 스웨덴, 이탈리아, 일본 등은 이미 1960~1970년대에 우라늄을 농축할 수 있는 원심분리기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이런 나라들은 맨해튼 프로젝트처럼 전국가적 자원과 인원을 쏟아 부은 것도 아니었다. 작게는 대여섯 명, 많게는 수십 명으로 구성된 프로젝트팀이 우라늄 농축 기술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예를 들어, 호주는 1965년 처음으로 원심분리기 개발에 도전했다. 이 프로젝트는 처음엔 세 명에서 시작했고, 가장 사람이 많을 때도 여섯 명을 넘기지 않았다. 연구에 참여했던 사람 중 이전에 방사성 동위원소 분리법을 연구한 경험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럼에도 5년 안에 개발에 성공할 수 있었다. 호주는 그나마 오래 걸린 편으로, 이탈리아나 영국은 불과 1년 만에 원심분리기를 개발했다.
물론 이들이 핵무기를 개발한 것은 아니다. 대개는 과학적 호기심과 원자력 발전에 응용할 방법을 연구할 목적이었다. 호주, 일본 등이 개발한 원심분리기는 소련과 미국의 것보다 크기가 작고 성능도 떨어졌다. 핵무기를 대량으로 만들 때 사 용하는 지름1m 이상의 원심분리기는 본체가 크게 흔들리기 때문에, 이를 상쇄할 수 있는 별도의 진동 방지 기능이 추가돼야 한다. 이 기술은 아직까지도 몇몇 국가를 제외하고는 개발하지 못했다. 하지만 고농축 우라늄만 있으면 언제든 포신형 폭탄을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어찌 보면 이들도 잠재적 핵보유국이나 마찬가지다.

새로운 대안이 필요한 때
북한은 어떨까. 켐프 교수는 e메일 인터뷰에서 “북한은 핵무기 개발에 성공한 파키스탄으로부터 우라늄 농축법을 배웠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 스스로 우라늄 농축 기술을 개발하기까지는 꽤 많은 시간이 걸린 것 같다”고 밝혔다. 그는 “지금은 북한이 고농축 기법을 완전히 마스터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실제로 지난 2010년 미국의 핵과학자인 스탠퍼드대 지그프리드 해커 박사는 방북한 뒤 “영변 우라늄 농축 시설에는 지름이 짧은 원심분리기 2000여 대가 돌아가고 있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켐프 교수는 “이제 기술적 장벽이 아닌 새로운 방법으로 핵확산을 막아야 할 때” 라며 “현재로서는 정치적 수단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밝혔다. 그는 1970년대 박정희 전 대통령 때 핵개발을 추진했던 한국과 최근 핵개발을 포기한 이란을 사례로 들었다. 당시 미국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핵우산을 제공하는 것으로 한국의 핵개발을 막았고, 이란은 국제사회에서 완전히 고립시킴으로 써 굴복시키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북한의 경우에는 좀 더 신중해야 된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다. “북한은 국제사회로부터 고립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현재로서는 북한을 상호존중하며 천천히 타협점을 찾아가는 것이 최선의 방법입니다. 만약 정치적으로 이런 일이 힘들다면, 차선으로는 북한이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기를 간절하게 기도하는 수밖에 없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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