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0년간 한국 현대문학의 흐름은 여러 굴곡을 껴안으며 유유히 흐르는 너른 강과도 같다. 그 강의 굽이굽이 모두가 인간이요, 역사며, 사회이자 우리네 일상이다. 그리고 강어귀의 한 나루에서 인간의 본질과 역사의 진실, 사회와 일상의 참모습을 만난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강어귀의 어떤 나루에서도 과학을 찾기란 쉽지 않다. 그것은 신기루와도 같아서, 언뜻 분명히 보이다가도 가까이 가면 홀연히 사라져버린다. 그 까닭은 문학과 과학의 만남이 다소 낯설고 어설픈 데서 찾을 수 있다. 이러한 어설픔과 낯섦은, 문학가와 과학자가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에 생긴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서로 만나지 않았던 것일까. 대부분의 경우 문학가는 과학을 모르기 일쑤고, 과학자는 문학에 문외한이기 십상이다. 불행히도 이것이 우리 현실이다.
그러나 달리 생각하면, 문학과 과학의 만남은 전혀 낯설지 않다. 소설 ‘태평양 횡단 특급’의 듀나를 떠올려보자. 그렇다. 과학소설, 즉 SF라는 장르가 있다. ‘해저 2만리’로 유명한 쥘 베른의 ‘인도 왕비의 5억 프랑’을 1908년에 이해조가 ‘철세계’로 번안한 이후, 우리 문학의 흐름 속에는 사실 SF가 줄곧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문학과 과학이 만나는 SF라는 강나루가 신기루처럼 보였다 사라지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그 동안 우리 사회에서 SF가 문학도 과학도 아닌 오락물로만 여겨져 온 것이 첫 번째 이유이다. 1923년에 처음 쓰였다는 SF 대신에 ‘공상과학소설’이라는 명칭으로 줄곧 불릴 만큼, 우리나라에서 SF는 과학을 다루되 비과학적이고, 문학인 체하지만 비(非)문학적이라는 혹평을 받아왔다. 이 때문에 문학 연구자들은 대체로 SF를 거들떠보지도 않았고 과학자 쪽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둘째로, 문학과 과학은 별개 행위라는 생각이 널리 퍼져있었던 사실을 들 수 있다. 예술의 한 영역인 문학이 과학과 무관한 것이라는 생각은 문학을 연구하는 일이나 그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과학과 담을 쌓게 만들었다.
과학이 이성에 근거하는 반면 문학예술은 상상력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식의 통념이 널리 퍼진 까닭에, 과학과 문학이 서로 어울려 만든 SF는 양쪽 모두에게서 찬밥신세가 됐고 ‘제대로 된’ 창작 활동이나 그에 대한 연구 모두 과학과 무관한 것인 양 치부돼 온 것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1990년대 이후의 SF 연구에 더하여, 문학과 과학의 새로운 만남이 조심스럽게 시도되었다. 모험적인 성격이 없지 않고 과학자들의 참여는 매우 미미하지만, 이러한 시도 자체는 높이 평가할 만하다. 이 새로운 만남은 본격 문학 작품 속에 과학이 어떻게 들어가 있으며 과학적 사고가 문학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가를 탐색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네 눈이 밝고나, 엑스 빛 같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문학과 과학은 어떤 관계를 맺어 왔을까. 동국대 권보드래 교수는 1910년대 문학작품 속에 등장한 현미경과 엑스레이라는 신문물을 통해 인간과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의 변화를 설명한다. 보이지 않던 영역을 보여줌으로써 가시성을 확대해준 엑스레이는 식민지로 전락한 당시 조선에 새로운 광명을 가져다주는 것이라고 생각됐다. 1914년 이광수는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네 눈이 밝고나 엑스 빛 같다 / 하늘을 꿰뚫고 땅을 들추어 / 온갖 진리를 캐고 말란다 / 네가 ‘새 아이’로구나’
(‘새 아이’ 1연, ‘청춘 3호’)
‘X 광선’이라고 설명까지 달아둔 ‘엑스 빛’을 새 아이의 눈에 비유함으로써 미래에 대한 기대를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태도는 인간과 사회를 이성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나라와 민족 차원에서 계몽할 대상으로 인간을 파악한 것이다. 눈의 분해능력을 최대로 확장해준 현미경 또한 이런 믿음을 불러 일으켰다. 당시 세태를 사실에 맞게 그려 보이려 한 신소설 중에는 ‘현미경’을 제목으로 달고 나온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사고방식은 1910년대 이후 신경쇠약과 결핵이 전면에 등장하면서 바뀌기 시작한다. 목격할 수도 치유할 수도 없으나 명백히 존재하는 병이 발견되면서, 육체 또한 비가시적이고 ‘징후’로만 해독될 수 있는 존재가 된 것이다. 이에 따라 우리 문학은 ‘죽음’과 ‘인생’을 발견하고, 인간의 ‘내면’이라는 비가시적이고 불투명한 세계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권 교수는 현미경의 도입이나 결핵균 발견과 같은 과학 문명의 발전이 인간을 바라보는 문학의 관점을 변화시키는 과정을 추적한다. 이러한 추적의 폭이 다소 좁아서 자료의 선별과 해석에 문제가 있을 수 있지만, 본격 문학과 과학의 만남을 복원했다는 점은 매우 중요한 성과라 할 수 있다.
한편 한남대 장수익 교수는 다윈의 진화론에서 발전해 나온 사회진화론 사상을 문학작품에서 검토해 20세기 초 문학가들의 정세 인식을 설명한다. 장 교수는 이해조의 ‘철세계’에 등장하는 다음 구절을 인용한다.
‘생존경쟁을 하는 세계에 우등인종이 이기고 열등인종은 패하며 약한 자가 고기 되고 강한 자가 먹으며 무거운 돌은 잠기고 가벼운 물건은 뜨는 것이 천지간에 떳떳한 이치라.’
진화론이 자연계에서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듯 사회진화론 역시 자명하다는 인식이 널리 펴져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사회진화론을 수용한 결과는 여러 작품에서 상이하게 나타난다.
이 가운데 최초의 신소설인 이인직의 ‘혈의 누’는 부정적인 경우에 속한다. 이인직은 작중 인물 구완서의 입을 통해 ‘일본과 만주를 한데 합해 독일과 같은 문명한 연방국을 만들자’고 주장하며 훗날 대동아공영권으로 발전한 일본의 입장을 간접적으로 대변한다. 이 같은 생각 역시 사회진화론을 자연법칙처럼 받아들인 토대 위에서 나올법한 것이다.
이에 반해 경쟁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되 살아남기 위해 투쟁해야 한다는 입장이 신채호의 소설 ‘꿈하늘’에서 나타난다. 작품의 한 대목에서는 “육계(陸界)나 영계(靈界)나 모두 승리자의 판이니 천당이란 것은 오직 주먹 큰 자가 차지하는 집이요, 주먹이 약하면 지옥으로 쫓기어 가느니라”며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론’이 전개되고 있다. 이처럼 과학은 사회사상으로 바뀌면서 현실 참여적인 문학에 깊은 영향을 남기기도 했다.
한편 과학은 유토피아를 약속하는 대표적인 상징으로도 인식되었다. 대전대 송기한 교수는 시인 김기림의 비평에 유토피아로 가는 수단으로 과학이 고려되었다며, 문학과 과학의 전문적인 만남을 보여준다.
송 교수는 1930년대 모더니즘 문학을 이끈 김기림의 문학론이 지금까지 알려진 대로 이미지즘에만 한정되지 않는다고 판단한다. 김기림은 ‘지성’과 함께 과학이 르네상스 시기로 상징되는 근대의 순수한 정신을 유지할 수 있는 중요한 조건이라고 주장했다. 송 교수는 “김기림이 근대 과학기술에 대한 낙관적인 신뢰를 굳게 가졌다”면서 “해방 후 발표한 시 ‘새나라 송’에서도 이 점이 확인된다”고 설명한다.
‘어린 기사들 어서 자라나 / 굴뚝마다 우리들의 검은 꽃묶음 / 연기를 올리자 / 김빠진 공장마다 동력을 보내서 / 그대와 나 온 백성의 새나라 키워가자
산신과 살기와 염병이 함께 사는 비석이 흔한 마을에 모터와 / 전기를 보내서 / 산신을 쫓고 마마를 몰아내자 / 기름 친 기계로 운명과 농장을 휘몰아갈 / 희망과 자신과 힘을 보내자
용광로에 불을 켜라 새 나라의 심장에 / 철선을 뽑고 철근을 늘이고 철판을 펴자 / 세멘과 철과 희망 위에 / 아무도 흔들 수 없는 새나라 세워가자’
(‘새나라 송’ 가운데 2~4연)
이 시는 조국 근대화와 산업화에 대한 뜨거운 열망을 표현한 것이어서 맹목적인 과학만능주의를 보여주지만, 한편으로 현대문학과 과학이 그만큼 가까워졌음을 반증하기도 한다.
김기림이 생각한 근대의 핵심을 모더니즘이 아니라 과학에서 찾는 송 교수의 발상은 매우 파격적인 것이어서 앞으로 뜨거운 논란이 예고된다. 이에 관한 충분한 근거가 마련될 때, 김기림 문학의 재조명과 더불어 한국문학과 과학의 새로운 관계를 찾아볼 수 있게 될 것이다.
문학과 과학의 관련성은 최근 발표되고 있는 한국시에서도 종종 발견된다. 서울여대 이숭원 교수는 이건청의 ‘푸른 말들에 대한 기억’, 김신용의 ‘환상통’, 김기택의 ‘소’ 등 올해 나온 시집에서 과학적 상상력이 어떻게 펼쳐지는지 분석한다. 이 교수는 이들 시에서 과학적 상상력이 생물학적 지식에 바탕을 두고 자연물을 소재로 사용하거나, 자연에서 일어나는 여러 현상을 비유적으로 전개하거나, 과학적 사유와 인식을 토대로 대상을 형상화하는 세 가지 유형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세 번째 유형에 속하는 김기택의 ‘우글우글하구나 나무여’ 1, 2, 4연을 보자.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어 답답할 줄 알았더니 / 일평생 꼼짝 못하고 한 자리에만 있어 외롭고 심심할 줄 알았더니
우글우글하구나 나무여 / 실뿌리에서 잔가지까지 네 몸 안에 나 있는 모든 길은 / 가만히 있는 것 같지만 쉬지 않고 움직이는 그 구불구불한 길은 / 뿌리나 가지나 잎 하나도 빠짐없이 다 지나가는 너의 길고 고단한 길은
우글우글하구나 나무여 / 추위로 익힌 독한 향기를 몰고 꽃에게 달려가는 수액은 / 가지에 닿자마자 소리지르며 하늘로 솟구치며 터지는 꽃들은 / 온몸에 제 정액을 묻힐 때까지 벌 나비 주둥이를 쥐고 놓아주지 않는 꽃들은’
이 교수는 이 시가 “나무를 정적인 사물로 보는 착각이나 편견을 경계하고 그것에 대한 반론을 제시하고 있다”고 강조한다. 정적으로 보이는 나무의 역동성을 생물학적인 지식에 근거해 노래함으로써, 과학이 수박 겉핥기식 사고의 관성을 깨뜨리고 실상을 포착하는 힘을 갖고 있음을 시로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과학적 상상력의 분류 기준이 모호하고 시를 해석하는데 있어서 문학성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는 인상을 주지만, 우리 주변의 시가 과학과 친근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귀 기울여 들을만한 주장이다.
소설 ‘복제개 스너피의 모험’을 꿈꾸다
지금껏 살펴본 대로 문학과 과학이 만나는 방식은 매우 다양하다. 인간관의 변화나 사회의식의 변모, 갈등처럼 근본적이고 거시적인 측면에서, 문학이론과 같은 전문영역이나 문학작품 안에 과학적 인식이 녹아있는 미시적인 분야까지 그 만남의 장소가 한층 화려하고 풍성해졌다.
물론 아쉬운 점도 없지 않다. 먼저 학술적인 측면을 고려해볼 때 문학사에서 나타났던 커다란 변화를 과학사에 맞춰 해석해보는 작업이 필요하다. 현대문학사를 양분하다시피 한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전개 과정은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 불확정성의 원리를 제기했던 1910년대 신과학혁명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과학의 발전이 불러온 세계관의 변화 속에서 문학 역시 변화해온 까닭이다. 바로 이 같은 변화를 탐구하는 것 또한 과학과 문학의 만남을 좀 더 의미 있게 해주는 일일 것이다. 이와 함께 문학 연구 방법 자체의 과학성을 심도 있게 따져본다면 양자의 만남은 깊이를 더할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있는 문학과 과학의 대표적인 만남이 SF라 할 때, 이에 대한 검토가 부족한 것도 다시 한번 따져봐야 한다. 한국에 올더스 헉슬리나 어슐러 르 귄과 같은 작가가 없다는 점을 탓할 수 없는 이상, SF 연구를 통해 문학과 과학이 한 걸음씩 서로에게 다가서도록 계속 노력해야 한다.
그렇게 될 때, 문학과 과학 모두에 대한 우리들의 관심이 한층 넓고 깊어질 것이고 문학과 과학이 만나는 공간 또한 더 커지고 정교해질 것이다. 문학이 과학을 만나는 나루에서 새로운 세기를 여행하고 돌아온 ‘복제개 스너피의 모험’을 우리에게 들려줄 젊은 소설가를 기대해본다.
과학만능시대 비판한 발칙한 상상
서양 현대 소설 속에서 과학은 어떻게 그려지고 있을까. 현대 과학과 기술 발전을 일찍 경험한 서양 소설에는 무조건적인 비판론에서 긍정론까지 다양한 흐름이 자리잡고 있다.
현대 공상과학소설의 고전 ‘솔라리스’의 작가 스타니스와프 렘은 지난 수십년간 미래학자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아왔다. 그의 소설은 모두 치밀한 논리와 냉철한 논거로 기술 발전 과정을 숙고한 결과물로 평가받고 있다. 탐사 대상이었던 행성 솔라리스가 오히려 인간을 잡아먹는 거대한 존재였다는 철학적인 내용 외에 렘은 컴퓨터 시대에 심화되고 있는 기술의 문제점을 작품 속에 녹여내고 있다. 특히 전세계적인 정보망의 위험성에 대해 일찍부터 눈떴던 렘은 인터넷이 ‘진정한 노아의 홍수’일 수 있다는 비판적 자세를 취한다.
‘채털리 부인의 사랑’을 쓴 데이비드 H. 로렌스 역시 산업사회를 인간과 자연에 대한 범죄로 간주해 혐오했다. 그는 자신의 작품 속에서 현대를 차가운 기계 세계로 묘사하면서 사랑을 통해 저항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과학의 발전이 작품성을 높인 경우도 있다. 토마스 핀천의 대표작 ‘중력의 무지개’(포물선의 양끝)는 과학적인 제목과 소재를 소설로 끌어들인다. 소설은 독일이 개발한 V2 로켓을 소재로 제2차 세계대전 종전 몇 개월을 그린다. 로켓의 비행 궤도를 등장인물 사건 전개에 절묘히 배치하며 소설을 점점 수수께기같은 미궁 속으로 밀어넣는다. 핀천은 이 소설을 쓰기 위해 로켓 편람과 과학서를 탐독했는데 상당수 독자들이 이 작품을 통해 V2로켓에 대한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앤서니 버제스의 수작 ‘시계 태엽 달린 오렌지’는 공상과 판타지, 과학을 갈아 만든 이상야릇한 이야기다. 소설은 공상의 세계를 사는 불량 청소년들의 일탈적 행동, 그리고 이를 교정하려는 국가기관의 교정프로그램을 통해 독자에게 폭력의 본질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폭력행위에 면역 반응을 일으키도록 두뇌를 개조하는 ‘루도비코치료법’이 인간을 결국 기계적인 시계태엽으로 전락시킨다는 묘사는 작가의 주제의식을 강하게 반영한다. 1971년 명감독 스탠리 큐브릭이 영화로 제작하기도 했지만 여전히 영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문제작으로 배척되고 있다.
이밖에 더글러스 쿠플랜드는 소설 ‘X세대’에서 어떤 사회 계층에도 속하지 않으려는 주인공 앤디와 그의 친구들의 일상을 그린다. 25세에 인생이 끝나버리는 주인공들에게 최고의 기업 IBM의 직원은 더이상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최신 전자제품과 고급스런 상표에 대한 탐닉 역시 목표를 상실한 삶을 뜻할 뿐이다. 작가는 과학기술이 가져온 대량소비, 매스미디어 시대의 소비문화에 대한 익살스런 비판을 날린다.